피토르 콜렌다(Piotr Kolenda)의 종전후 사진. 그는 전쟁 전에 도지엔시올스키(Dzienciolski)와 비엘스키(Bielski) 가족을 모두 알고 지내던 노보그로덱 출신 지주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여자들을 숲으로 도망가기 안전할 때까지 숨겨 주었으며 숲에서 활동하던 비엘스키 유격대 대원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하다마의 안락사 학살 희생자가 안장된 하다마 공동 묘지. 이 사진은 전쟁이 끝나가는 즈음에 찍은 것이다. 독일, 하다마, 1945년.
하이카 그로스만(Haika Grosman), 비알리스톡 게토 폭동에 참여한 비알리스톡 게토 지하 조직의 임원 중 일원. 폴란드, 1945년.
하이파 항구에 닻을 내린 알리야 베트(“불법” 이민) 선박인 “여호수아 웨지우드”호 난간에 운집한 난민들. 영국 군인들이 이 승객들을 에트리트 억류 센터로 이송시켰다. 팔레스타인, 1946년 6월 27일.
학교 밖에서 나치 깃발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독일 소녀의 단체 사진. 이 중에는 6개월 후에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릴리 엑슈타인(Lilli Eckstein)도 포함되어 있다. 독일 헬덴베르겐, 1935년.
베를린의 오페라 광장에서 서적 소각이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과 SA 회원들에게 "비 독일적"으로 판정된 불온 서적을 소각한 노력을 치하하는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강단앞). 독일, 1933년 5월 10일.
한나 체네스(Hannah Szenes), 팔레스타인으로 떠나 구출 임무를 수행하는 낙하산병이 되기 이전의 부다페스트 자신의 집 정원에서 찍은 사진. 헝가리, 부다페스트, 1939년 이전.
함부르크에서, 함부르크 대학의 학생들과 SA 회원이 "비 독일적"이라고 판단한 서적을 소각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1933년 5월 15일.
해방 직후 영국 여성이 수용소 생존자들의 신발 신는 일을 도와 주고 있다. 독일, 베르겐-벨젠, 1945년 5월 이후.
해방 직후, 부헨발트의 “어린이 블록 66”-어린이를 위한 특별 막사. 독일, 1945년 4월 11일 이후.
해방된 포로들이 부헨발트 집단 수용소의 과밀한 수용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 1945년 4월 23일.
해방이 진행되는 동안 베르겐 벨젠 집단 수용소 막사에 있는 로마니(집시) 생존자. 독일, 1945년 4월 15일 이후.
헝가리 북서부의 작은 마을인 코세그(Koszeg)의 기차역에서 이송을 기다리고 있는 유태인 여성, 어린이 및 노인. 헝가리 코세그, 1944년.
헝가리 유태인 릴리 카즈에게 발행된 스웨덴 "보호 통행증". 이 문서는 라울 발렌베르그(왼쪽 하단)가 서명하였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1944년 8월 25일.
헝가리 정부가 설립한 강제 노동 수용소 채석장에서 일하고 있는 유태인들. 헝가리, 토카이, 1940년.
헝가리에서 이송된 유태인이 아우슈비츠 대량 학살 수용소에서 선발을 기다리며 열을 지어 있는 모습 폴란드, 1944년 5월.
헤르미네 오르시(Hermine Orsi)는 그녀의 집에 여러 명의 유태인을 숨겨 주었고 다른 사람들과 르 샹봉 쉬르 리니옹의 난민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이후에 야드 바셈(Yad Vashem)은 그녀를 “나라의 의로운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프랑스, 마르세이유, 1940년.
협동 농장 정착지, 키부츠 세도 얌의 유태인 낙하산병 한나 체네스(Hannah Szenes) 팔레스타인, 1941년
환자들을 비스바덴 인근의 공립 병원에서 하다마 안락사 센터로 수송한 버스. 하다마 안락사 센터에서 환자들은 독가스 또는 독극물 주사로 학살되었다. 독일, 1941년 5월부터 9월 사이
히에로님 사발라(Hieronim Sabala, “플로라(Flora)”로도 알려짐)는 “회색 기둥”(폴란드 저항 운동의 지하 조직의 암호)의 회원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1939년.
히틀러 소년 단원들이 지휘관인 발두르 폰 쉬라흐(우측, 경례하고 있는 사람)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를 비롯한 다른 나치 장교들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독일, 뉘렌베르그,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된 후, 히틀러는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많은 개인 자유를 금지시키도록 내각을 설득시켰다. 이 사진에서는 경찰이 차량에서 무기 검색을 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 1933년 2월 27일.
“세인트 루이스”호에 승선한 승객들. 나치 독일을 출발한 난민들은 쿠바와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1939년 5월 또는 6월.
“아리아인”과 흑인 여성 사이의 우정을 묘사한 나치의 선전용 사진. 자막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결과! 인종적 자부심의 결여” 독일, 전쟁 발발 전.
“오스타바이터(Ostarbeiter)” (동부 노동자들)은 대부분 강제 노동을 위하여 독일로 이송된 동부 유럽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OST” 신분증 패취(사진의 중간 아래쪽)를 착용하고 있었다. 독일, 1942년 이후.
“황야의 여우와 맹세하는 유태인을 믿지 마라”는 제목의 반 유태주의 독일 어린이 동화책의 표지. 독일, 1936년.
16세의 가정부인 에미 G.(Emmi G.)는 정신 분열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고 메세리츠-오브라발트 안락사 센터로 보내진 후 1942년 12월 7일 진정제 과다 복용으로 안락사되었다. 날짜와 장소는 불확실함.
1920년대에 출판된 다양한 시온 장로 의정서 판본과 마찬가지로, 이 프랑스어 판본은 유태인이 외국인이며 위험한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파리에서 출판됨, 1920년.
1922년까지, 인터내셔널 유대인 (The International Jew)은 독일에서 이미 제21판으로 출간되었다. 이 버전은 라이프찌히에서 1922년 출판된 것이다.
1923년 나치 반유대주의를 보강시킨 역할을 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시온 장로 의정서에 대한 해설서. 이것은 네번째 출판된 원고이다. 1933년 뮌헨에서 출판됨.
1932년 독일 베를린에서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는 프리츠 글루크스타인 (Fritz Glueckstein) (왼쪽). 프리츠의 아버지는 자유파 유대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유대인이었고 어머니는 기독교인이었다. 1935년 뉘렌베르크 법에 따라 프리츠는 혼혈로 분류되어야 하였지만, 아버지가 유대교 커뮤니티의 일원이었으므로, 프리츠는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1933년 3월 21일, 독일 수상으로 임명된 직후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포츠담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 포즈는 히틀러가 자신은 기득권 자들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이 사진은 유명한 엽서에 실린 이미지이다. 또한 이 사진은 독일 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도 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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