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은 연속되는 나치 독일의 공격을 뚫고 유럽으로 진군하면서 강제 포로 수용소에 이르게 될 때마다 이들 수용소의 수감자들과 독일 내에서 자행된 죽음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나치의 주요 수용소에 처음으로 진격한 것은 소련군으로서 1944년 7월, 루블린 부근의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다다랐다. 빠른 소련군의 진격에 놀란 독일군은 대량 학살의 증거를…
주요 독일군 관리들은 뉘렌베르그에서 열린 국제 군사 재판 법정(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IMT)에 회부되었다. IMT는 영국, 프랑스, 소련 및 미국의 판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45년, 종전 후 열린 전쟁 범죄 재판의 대부분은 하급 사무관 및 하급 장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 졌다. 이러한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에는 수용소 경비병, 사령관, 경찰관, 이동 학살 부대원들 그리고 의학 실험에…
1945년 1월, 독일제3제국은 패전에 직면하였다. 연합군이 나치 수용소로 진격해 오자, SS는 대규모 인원의 집단 수용소 수감자들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집단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죽음의 행군을 조직하였다. 아마도 “죽음의 행군”이라는 용어는 집단 수용소 수감자들 사이에서 신조어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집단 수용소 수감자들이 삼엄한…
독일의 유태인 중 80퍼센트(약 40만명)이 독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폴란드 시민권을 가진 유태인들이었으며, 이중 대다수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독일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유태인 중 약 70퍼센트는 도심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모든 유태인 중 50퍼센트는 독일의 10대 대도시들에 거주했다. 가장 많은 유태인 거주지로는 베를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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