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는 독일 중북부의 카젤에서 태어났지만 라인 지방에서 성장했다. 발터는 청소년 시절에 배웠던 독일 우월주의와 반유태주의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반나치주의였던 그의 아버지는 발터가 아돌프 히틀러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히틀러 청년단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했다. 그러나, 발터는 반항적인 성향으로 인해 유태인 친구를 자신의 지하실에 숨겨주게 된다. 또한, 청년 나치 단원들을 괴롭히는 갱을 조직하고 프랑스 전쟁 포로를 도왔다. 이들은 자신들을 (독일의 다른 반정부 청년 그룹이 그랬던 것처럼) 에델바이스 해적단이라고 불렀다. 1943년 발터는 폭격을 받은 상점에서 신발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는 결국 라벤스부뤼크 수용소로 이송되어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다. 1945년, 발터는 결핵에 걸렸기 때문에 자신이 살해되기 전에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짙은 안개에 숨어서 한 농가에 도착했다. 농부는 그에게 아들의 군복을 입혀서 기차를 타고 고향인 뒤셀도르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발터는 병원에 입원한 후 건강을 회복하고 나중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우리는 보통 킹즈 애비뉴에 있는 카페에서 모였어요. 이곳은 미국의 5번가와 같이 독일에서 유명한 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뒤셀도르프의 킹즈 애비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중 하나일 거에요. 화려하고 넓은 거리에, 중간에 강이 흐르고, 밤나무가 가득 들어찬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카페로 갔었는데 그곳에는 당구장도 있었어요. 우리는 당구를 즐기고는 했는데, 그 곳에서 잠시 회의를 하면서 "신입 회원이 있어요"라고 누군가 말하면 그 사람에게 "왜 우리모임에 가입하고 싶나요?"라고 질문하고 테스트했죠. 정말로 가입하고 싶어하는지 확인해야 했거든요. 우리는 회의하다가 "다음에는 무엇을 하지?"라고 질문하면 누군가 "히틀러 청년단들은 물건을 이런 장소에 보관한대. 한탕 해볼까"라고 말하면, 모두 "좋은 생각이다. 언제 만나지?"라고 말하고는 특정 시간에 약속을 했어요. 이것이 우리가 한 일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너무 과격해서인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찾기 시작했어요. 타이어를 펑크 내고, 자전거를 훔치고 하는 행동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는 사람들이 불만이 너무 많아지기 시작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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