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루가 수용소에서 소련 장교들이 장작 더미 위의 시체들을 보고 있다. 소련군의 빠른 진격 탓에 독일군들이 이 시체들을 소각할 겨를이 없었다. 에스토니아, 클루가, 1944년.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탄압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찾았던 많은 사람은 미국의 제한적인 이민 할당량과 복잡하고 까다로운 비자 조건 때문에 좌절을 겪게 된다. 당시 미국 여론은 이민자 확대에 부정적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민 정책을 변경하라는 정치적 압력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 문제와 국가 안보를 우선시했다.
오늘날 난민 위기는 대량학살과 인권침해의 분쟁의 결과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적 난민보호 단체들이 난민 문제를 국제 사회의 책임으로 규정했지만, 전 세계 국가들이 이러한 국제적 의무를 이루기 위해 갈 길은 아직 멀다.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폴란드에있는 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 (Piotrkow Trybunalski) 거리에서 가까이 찍은 다비드 쟈모스쥴의 사진. 다비드는 트레블링카 학살 센터에서 9살에 살해 되었다.
서브카파티안 러스 (Subcarpathian Rus) 지역으로부터 온 유태인들이 강제추방 열차에서 내려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에 위치한 아우스비츠 벌크노 (Auschwitz-Birkenau) 수용소 램프에 모여있는 모습. 1944년 5월.
에이시스케 마을의 한 뜰에서 포즈를 취한 젊은 여성들. 이 슈테틀(소규모 유태인 촌)의 유태인들은 나치 특별행동부대에 의하여 1941년 9월 21일에 살해 되었다. 1941년 9월 이전에 찍은 사진.
체르니우치 (첸아우티) 게토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로 강제 추방 당하기 직전에 유태인 신분증을 달고 찍은 바이든펠트 가족의 사진. 왼쪽으로 부터 오른쪽으로, 이베트, 메슈렘버, 셀리, 그리고 짐혜 바이든펠트. 1941년 10월, 로마니아, 첸아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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