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G. 파르벤 공장에 인접한 아우슈비츠 III(모노비츠)의 항공 사진 미군 폭탄 투척 임무 직후에 촬영된 사진. 폴란드, 1945년 1월 14일.</p>

미국과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

1944년 봄에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가스를 이용한 대량 학살 행위에 대한 더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다. 어떤 날은 약 10,000여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유태인 단체들은 학살 행위의 중단과 유럽에 남아있는 유태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일부 유태인 지도자들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지도자들은 그 제안을 반대했다. 양측은 일부 연합군 관계자들과 마찬가지로 폭격으로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까지 사망하거나 이를 선전으로 악용하려는 독일군의 의도를 두려워했다. 그 어느 누구도 결과를 확신할 수 없었다.

1944년 7월에 영미 연합 공군이 실레지아(Silesia)의 목표물(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위치한 장소)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후에도 미국 당국은 아우슈비츠를 폭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국 당국은 이 결정에 대해 아군 항공기가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해서 공중 폭격할 수 있는 기술이 떨어지며, 전략적으로 연합군은 전쟁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끝내기 위해 군사적 목표물들을 우선적으로 폭격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44년 7월 중순 연합군이 가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폭격은 1944년 5월 15일부터 7월 11일 사이 그들이 수용소에 도착하는데로 독일군들이 학살한310,000여 명에 달하는 헝가리계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가스실과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은 비르케나우의 막사에는 약 51,117여명(이들 중 31,406명은 여자와 아이들)의 수감자들이 갇혀 있었다.

1944년 여름과 가을, 세계 유태인 총회(World Jewish Congress)와 WRB는 미국 국방성에 아우슈비츠를 폭격할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반려되고 말았다. 8월 14일, 존 J 머클로이(John J. McCloy) 전쟁 차관보는 "이러한 작전은 상당한 공중 지원을 통한 교란이 있어야 실행이 가능할 것"이라며 "현재 아군은 다른 작전지에서 매우 중요한 임무 수행 중에 있으며 이렇게 결과가 확실하지않은 상황에서 아군 자원을 투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발표가 있은 후 일주일도 안되어 미국 육/공군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학살 수용소에서 약 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III 수용소 근처의 이게파르벤(I.G. Farben) 합성 오일과 고무(Buna) 공장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에 가해진 폭격은 그곳에 갇힌 수감자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어떤 생존자는 그 때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는 어떠한 죽음이라도 더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폭탄이 터질때마다 우리는 오히려 기뻐했고 삶에 대한 새로운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후 수십년간 가스실 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에 폭격을 가하지 않기로 한 연합군의 결정은 종종 심한 논쟁의 불씨로 남아있다. 폭격 지지자들은 그러한 조치가 언느정도의 수감자들을 희생 시켰을수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학살 행위를 늦추고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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