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수용소 채석장에서 돌을 실은 덤프카를 끌고 있는 여성 죄수들. 폴란드, 플라소우 수용소, 1944년.</p>

홀로코스트 기간 중의 여성들

나치 통치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유태인들을 탄압하고 궁극적으로는 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성별을 가리자면 나치 통치는 유태인과 비 유태인을 불문하고 여성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로마니(집시) 여성, 폴란드 여성 그리고 일상 생활의 영위가 힘든 여성들도 목표로 삼았다.

여성만으로 구성된 수용소가 존재하기도 하였고 일반 수용소 내에서도 여성 수감자들을 위한 특정 지역이 정해져 있기도 했다. 1933년 5월, SS는 여성들을 수감하기 위한 나치 최대 규모의 수용소인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를 설립하였다. 1945년, 소련군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를 해방하였을 당시, 수용소에는 100,0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1942년, SS 당국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아우슈비츠 II)에 여성 수감자들을 따로 수용하기 위한 별도의 수용동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곳에 처음 수용된 수감자들 중에는 SS 부대에 의하여 라벤스브뤼크에서 수송된 수감자들도 있었다. 베르겐-벨젠 수용소 당국은 1944년, 여성 수용소를 별도로 건설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에 SS는 수천 명의 유태인 여성 수감자들을 라벤스브뤼크에서 이송하여 베르겐-벨젠에 배치하였다.

대량 학살 실행에 있어서 독일과 그 협력자들은 여성이나 어린이-유태인 또는 비 유태인들을 가리지 않았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나이와 성별을 불문한 모든 유태인들에 대한 전멸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SS와 경찰들은 “최종 해결”이라는 정책을 수행하였다. 독일 SS와 경찰은 소련 점령 지역의 수백 개의 지역에서 남자와 여자들을 대량으로 총살하였다. 수감자 수송 과정에서 임산부와 어린 아이들의 어머니는 계속적으로 “노동 불가능자”로 낙인찍혔다. 그들은 대량 학살 수용소로 수송되어 제일 먼저 가스실로 보내지곤 했다.

정통 유태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은 은신을 해도 발각되기 쉬웠고 포그롬과 같은 박해가 일어날 때 특별히 폭력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어린이를 동반한 정통 유태인 여성들이 특히 쉽게 희생되었다. 정통 유태인 가정은 특히 자녀의 수가 많았으므로 이러한 가정의 여성들은 나치의 특별 목표가 되었다.

비 유태인 여성도 무력한 희생자임에는 다름이 없었다. 1943년에서 1944년 사이, 나치는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로마니 여성들을 대량 학살하고, T-4 및 기타 안락사 작전을 통하여 장애 여성들을 죽였다. 그리고 소련 지역의 많은 마을에서 여성들을 비롯하여 소위 빨치산이라고 부르는 남자들을 학살하였다.

게토와 집단 수용소에서 독일 당국은 여성들을 강제 노동에 투입하였는데 그 작업 환경은 심히 열악하여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독일 의사들과 의학 연구팀은 유태인과 로마니(집시) 여성을 상대로 불임 연구나 비 윤리적 인간 실험을 실시하였다. 수용소와 게토에서 여성들은 특히 심한 구타와 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임신한 유태인 여성들은 종종 그들의 임신 사실을 숨겼다 발각되면 낙태를 당해야 했다. 폴란드와 소련에서 이송되어 온 여성들은 제3제국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는데 종종 구타나 강간을 당하거나 음식이나 다른 생필품의 대가로 또는 단순 쾌락을 위하여 성 상납을 강요받았다. 폴란드, 소련, 유고슬라비아의 강제 노동 여성들은 독일 남자들과의 성 관계를 강요받은 결과로 임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소위 말하는 “인종 전문가”의 판단으로 아이가 “독일화”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면 여성들은 강제로 낙태 시술을 받거나 태어난 아이를 확실하게 죽이는 조산원으로 보내지거나 또는 음식이나 의료 지원 없이 고향으로 돌려 보내졌다.

수용소에 수감된 많은 여성들은 서로 정보와 음식 그리고 의류를 공유하면서 생존을 꾀하는 비공식적인 “상호 보조(Mutual assistance)” 단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단체는 주로 같은 도시나 지방 출신이거나 비슷한 학벌 또는 가족 유대 관계를 가진 여성들끼리 형성되었다. SS 수용소 관계자들이 의류 수선, 요리, 세탁 및 청소 같은 일에 배정한 여성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성들은 레지스탕스 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공산주의 또는 시온주의 청년단원 소속 여성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폴란드의 경우, 여성들은 정보를 게토에 전달하는 밀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여성들이 동부 폴란드의 삼림 지대와 소련으로 탈출하여 무장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였다. 여성들은 프랑스 (및 프랑스-유태인) 레지스탕스 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뮌헨 대학 학생이며 화이트 로즈 레지스탕스 그룹의 일원이었던 소피 슈올(Sophie Scholl)은 반 나치 전단지를 나누어 주다가 체포되어 1943년 2월에 처형되었다.

어떤 여성들은 게토 레지스탕스 조직의 지도자나 대원이 되었다. 비알리스토크의 하이카 그로스만(Haika Grosman)이 그러한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수용소 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여성들도 있었다. 아우슈비츠 I 수용소에서는 비스툴라-유티온-금속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던 5명의 유태인 여성들-알라 게르트너(Ala Gertner), 레지나 사피르쯔타인(아카 사피르, Regina Safirsztajn), 에스터 바이블룸(Ester Wajcblum), 로자 로보타(Roza Robota), 그리고 페가 세갈(Fejga Segal)로 추정되나 성명은 확실하지 않은 여성-은 유태인 특공 파견대(Sonderkommando, Special Detachment)의 대원들에게 화약을 제공하여 1944년 10월에 발생한 폭동에서 가스실을 폭파하고 SS 대원들을 죽게 하였다.

다른 여성들도 유럽의 독일 점령지에서 유태인을 돕고 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여성들에는 유태인 낙하산병, 한나 체네스(Hannah Szenes)와 시온주의 운동가 기시 플레슈만(Gisi Fleischmann)도 있었다. 체네스는 1944년에 헝가리로 낙하하였다. 플레슈만은 브라티슬라바의 유태인 의회에서 운영하는 활동 그룹(Pracovna Skupina)의 지도자로서 슬로바키아로부터 유태인들의 강제이송을 저지하려 했다.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학대를 받거나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성별이 아니라 나치의 인종주의 서열 또는 종교적, 정치적 연관성을 기준으로 분류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