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독일 나치와 그 협력자들이 국가의 비호 아래 조직적으로 유럽의 유태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유태인들이 주요 희생자들 이었으며 600만명이 학살되었다. 로마니(집시), 육체적 및 정신적 장애인들, 그리고 폴란드인 등도 인종, 민족 또는 국적을 이유로 파괴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소련군 전쟁 포로, 그리고 반체제 인사 등도 극심한 탄압과 학살을 당했다.
홀로코스트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독일 나치와 그 추종자들이 국가의 비호 아래 조직적으로 유럽의 유태인을 박해하고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유태인이 주요 희생자였으며 600만명이 학살되었다. 로마니(집시), 육체적 및 정신적 장애인들, 그리고 폴란드인 등도 인종, 민족 또는 국적을 이유로 파괴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소련군 전쟁 포로, 그리고 반체제 인사 등도 극심한 탄압과 학살을 당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세력을 얻기 시작했다. 나치는 독일인이 "열등한" 인종과의 생존 경쟁에서 멸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생물학적으로 "우수한" 인종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특히 유태인이야 말로 "독일인(아리아인) 인종"의 생물학적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1938-1939년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폐허로 만들면서 독일의 세력을 중부 유럽까지 확장시켜 나아갔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 폭력 사태 이후 나치는 독일계 및 오스트리아계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최초의 조직적인 체포 활동을 시작했다. 수정의 밤 이후 독일은 약 3만명의 유태인 남성들을 다하우(Dachau)와 기타 집단 수용소로 이송했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수 주 내에 폴란드 군은 패배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돕기 위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독일과 비밀 협정을 맺은 소련군은 1939년 폴란드 동부를 점령했지만 1941년까지 공식적으로 중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독일군은 "우수한 독일 인종"의 새로운 생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폴란드인들을 살해하거나 재정착시켰다. 독일 가정은 비어 있는 사유지에 정착했다. 독일 정부는 유태인들을 게토에 강제로 정착시켰는데, 게토는 독일군의 감독 하에 상상할 수 없는 불결한 환경에서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된 도시 구역이었다.
이후 2년간 독일군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저지대 국가들(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과 프랑스를 침공하는 등 승승 장구하였다. 1940년 6월, 독일군이 파리 근처까지 진군하자 독일의 주축국이던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와중에 소련은 핀란드를 공격해서 루마니아의 동부 국경에 있는 2개 지방을 합병했고 발트해 국가(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를 점령했다.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및 불가리아와 그 이후에 핀란드 및 크로아티아는 독일의 우방이 되었다. 1941년 봄, 주축국 동맹은 유고슬라비아를 탈퇴시키고 그리스를 점령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을 공격하였다.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한 곳까지 진군했다. 이 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이기도 했다. 독일 전투 부대 이후에, 독일군의 지원을 받던 이동 학살 부대(아인자츠그루펜), 특별 명령 수행 경찰 부대 및 기타 SS 부대는 대량 총살을 통해 유태인들과 기타 희생자들을 학살했다. 이들은 대량 총살로 150만명 이상의 유태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을 학살하였다. 독일 경찰 및 군 당국도 점령지 유고슬라비아 및 폴란드 동부쪽에서 대량 총살로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소련군의 저항이 증가하면서 독일군의 진군이 중단되었고 독일군은 주요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코바를 점령하지 못했다. 1942년 여름, 독일군은 2차 공격을 통해 볼가강과 북부 코카서스 지역까지 소련 영토 남동쪽으로 깊숙이 진군했다.
독일군의 진군이 동쪽에서 중단되자 독일은 유럽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1942년 독일군은 체계적인 유태인 학살 행위를 다른 점령지로 확장했다. 독일 SS 및 경찰 당국은 유태인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고 인구 밀도가 높은 독일 점령지 폴란드에 학살 센터들을 설립했다. 이들은 유럽의 모든 독일 점령지로부터 주로 철도를 통해 유태인들을 그 센터들로 이송했다. 학살에는 주로 일산화탄소 또는 지클론 B 가스(시안화 수소)가 사용되었다.
1942년 말과 1943년 초, 소련은 독일의 침공에 대하여 보복성 공격을 시작하였고 독일 점령 지역들을 해방시켰다. 같은 해 여름, 연합군은 서부에서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은 프랑스 북부에 상륙하여 서유럽을 해방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독일 동부 전선으로 진군했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독일군이 퇴각하자, 연합군은 수만명의 집단 수용소 수감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많은 수의 수감자들이 연합군에 넘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군은 여러 수용소들에 갇혀있던 수천명의 수감자들을 도보로 독일 영역으로 대피시켰다. 수감자들은 이 강제 행진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불렀다.
1945년 봄, 남아 있는 집단 수용소는 말 그대로 죽음의 골짜기와 같았다. 수용 인원이 너무 많고, 오물이 가득하고, 물자가 부족한 수용소는 집단적인 죽음의 현장이 되었다. 1945년 1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집단 수용소 인원의 절반 가량이 사망했다.
1945년 5월, 독일군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수백만명의 다른 희생자들 외에도,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은 유럽에서 3명 당 2명 꼴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유럽에서 수백년의 전통을 지닌 수백개의 유태인 커뮤니티들이 홀로코스트라고 하는 대량 학살로인해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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