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ransport of Jewish prisoners marches through the snow from the Bauschovitz train station to Theresienstadt. [LCID: 69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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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순으로 정렬된 홀로코스트와 제2차 세계 대전의 문서로 나치 집권, 홀로코스트의 원인, 수용소와 게토의 삶과 전후 제판 같은 주제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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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점령지 폴란드의 게토

    기사

    동유럽에는 수백만명의 유태인들이 거주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2백만명 이상의 폴란드계 유태인들이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수백만명의 유태인들이 추가로 나치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독일군은 유태인들을 마을이나 도시의 지정된 구역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방대한 유태인 인구를 통제할 목표를 세웠는데, 이러한 구역을 나치는…

    독일 점령지 폴란드의 게토
  • 독일의 소련 침공 (194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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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 때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연말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외곽까지 수백 마일을 진격하게 된다. 침공 직후 기동 학살 부대는 소련 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기 시작했다. 독일군과 민간 당국 점령 정책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소련 전쟁 포로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 (1941년 6월)
  • 독일제3제국: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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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의 집권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지배하던 의회 민주주의인 바이마르 공화국에 종말을 가져왔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 수상으로 취임하자 나치 정권(또는 제3제국)은 독일인들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정권으로 빠르게 변모하였다. 1933년 2월 28일, 독일 의회에 의문의 방화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헌법적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령을…

    독일제3제국: 개요
  • 동부전선: 독일이 소련과 전쟁을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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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과 동맹국들이 소련을 침공했다. 추축국은 소련 영토의 넓은 지역을 빠르게 정복했다. 독일군은 소련국과 그 국민을 상대로 "말살 전쟁"을 벌여 수백만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결국 독일군을 밀어내고 마침내 1945년 봄 베를린을 점령했다. 종종 "동부전선"이라고 불리는 독소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규모가 가장 컸고 사상자도 많았다.

    동부전선: 독일이 소련과 전쟁을 벌이다
  • 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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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론유럽에서는 반 유태주의, 국가주의, 타 인종에 대한 혐오감, 반공산주의, 기회주의의 영향으로 독일이 점령한 국가들의 많은 시민들은 나치 정권에 동참하여 유럽계 유태인 말살과 기타 나치 인종 정책에 동조했다. 이러한 동조는 "최종 해결"및 나치 정권의 목표가 되었던 다른 그룹에 대한 대량 학살을 실시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 동조자들은 홀로코스트 기간중에…

    동조
  • 르완다: 인종 말살에 대한 첫 유죄 판결

    기사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인종 말살"이라는 합법적인 개념은 없었다. 1998년 9월 2일,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UN이 설립한 법원)는 국제 재판소 재판후에 인종 말살이라는 범죄를 정의하고그 범죄 행위에 대하여 세계 최초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장 폴 아카이수는 르완다의 타바에서 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관여하고 감독했던 인종 말살및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르완다: 인종 말살에 대한 첫 유죄 판결
  • 미국과 홀로코스트

    기사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과 다른 나치 희생자들의 구출은 미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아니었다. 독일 전선의 후방에서 대규모 구출 작전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연합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항상 분명치는 않았다. 일부 반 유태주의(유태인에 대한 증오 또는 편견), 고립주의, 경제 공황 및 외국인 기피증(Xenophobia, 외국인에 대한 공포 또는 편견)으로 인하여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

    미국과 홀로코스트
  • 미국과 홀로코스트

    기사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과 다른 나치 희생자들의 구출은 미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아니었다. 일부 반 유태주의(유태인에 대한 증오 또는 편견), 고립주의, 경제 공황 및 외국인 기피증(xenophobia, 외국인에 대한 공포 또는 편견)으로 인하여, 미국 정책은 난민들에게 미국 입국 비자를 내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미 국무성의 인종 학살에 대한 보고서 역시 그 발간이 늦어지고…

  • 미국과 홀로코스트: 구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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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해 단호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내리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미국 당국은 독일군을 무찌른 미군의 승리가 집단 학살을 끝내는 최선의 전망을 제시했다는 논쟁을 앞세워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은 사실을 정당화했다. 1942년 하반기 "최종적 해결(Final Solution)"에 대한 대중 계몽으로 인해 깊어진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 미국과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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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봄에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가스를 이용한 대량 학살 행위에 대한 더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다. 어떤 날은 약 10,000여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유태인 단체들은 학살 행위의 중단과 유럽에 남아있는 유태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일부 유태인 지도자들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지도자들은 그…

    미국과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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