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
나치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은 유럽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대량 학살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되었고 종종 "최종 해결책"(Endlösung)이라고 불린다. "최종 해결책"은 나치 유대인 탄압의 비극적인 절정이었다. 홀로코스트(1933~1945)의 핵심 사헌인 것이다.
나치 독일은 "최종 해결책"을 시행하기 위해 유럽 유대인을 기아, 질병, 무작위 폭력 그리고 대량 총살과 가스 학살 같은 방도로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처음부터 유대인을 학살할 계획이었는가?
아니다. 나치가 1933년에 집권했을 때 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할 계획이 없었다. 그래도 나치는 반유대주의적이었고 독일계 유대인들이 나라의 문제점으로 인식했다. 해서 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했다. 독일에서 유대인을 어떻게 추방해야 하는가? 이것을 종종 "유대인 문제"라고 불렀다.
집단 학살도 "유대인 문제"에 대한 나치의 첫 번째 해결책이 아니었다. 실제로 다양한 반유대 정책과 계획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전반에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려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면서 나치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다. 결국 유대인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 반유대주의 정책을 어떻게 변화했는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나치 독일은 유럽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영토 확장과 추축국 동맹으로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유럽의 수백만 유대인들이 독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기간에 "유대인 문제"는 나치에게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 반유대주의 정책이 점점 더욱 극단적으로 변하면서 수천 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피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나치는 아직 "최종 해결"을 집단 학살을 즉시 저지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 나치는 전 유대인 공동체를 이주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들은 독일 점령지 폴란드의 보호 구역, 시베리아, 심지어 아프리카 섬 마다가스카르까지 유대인을 이주시킬 계획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너무 어려우니 나치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책을 모색했다.
점령지 폴란드에서 독일군은 1939~1940년에 게토를 설립한다. 게토는 점령지에서 유대인을 비유대인 인구와 격리시키기는 것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도시에서 밀집된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도록 만든 별도의 구역이었다. 이러한 구역을 벽이나 다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게토 주민들은 질병, 기아 및 잔혹한 대우로 사망하게 된다.
나치는 언제부터 어떤 방법을 통해 조직적으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기 시작했는가?
나치는 1941년부터 조직적으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같은 해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 시작됐다.
독일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특수 친위대(SS)와 경찰 부대가 뒤를 따랐다. 이들의 임무는 보안과 나치 독일의 적, 즉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부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이나 성별 상관없이 유대인 공동체들을 전부 학살하기 사직한다. 대량 총살 이외 가스 밴도 이용하여 유대인과 다른 집단들도 학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적인 대량 총살과 가스 학살은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의 급진화를 반영했다. "최종 해결"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절멸 수용소는 "최종 해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나치는 대량 학살을 저지르기 위한 절멸 수용소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나치는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기 위해 가스실이나 이동식 가스 밴을 사용했다.
주요 5게 절멸 수용소는 헤움노(Chełmno), 베르제크(Bełżec), 소비보르(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및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였다.
유대인들을 유럽 대륙에서 이 절멸 수용소들로 이송했다. 대부분 출발점은 점령지 폴란드 같은 지방에 건설한 게토였다.
"최종 해결"은 홀로코스트와 동일한 것인가?
"최종 해결"은 홀로코스트와 다른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국가 정책으로 유럽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탄합하고 살해한 과정을 의미한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과 동맹 추축국에 의해 조직되고 자행되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홀로코스트의 마지막 단계였다. 이 과정에는 유럽 유대인을 고의적이고 계획된 대량 학살이었다. "최종 해결" 전에 이미 많은 유대인이 학살되었지만 홀로코스트에 대다수의 유대인 회생자들은 이 과정 때 학살되었다.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희생자 수
나치와 협력자 및 동맹국은 홀로코스트에서 총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것은 전쟁 전 유럽 유대인 인구의 약 3분의 2였다.
주요 날짜:
1940년 2월
로츠(Łódź) 게토 설립
1940년 2월 "최종 해결"이 시작되기 전에 독일 당국은 점령지 폴란드 도시 로츠에 게토를 건설한다. 그 당시 로츠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였다. 1940년 독일 당국은 160,000명 이상의 폴란드계 유대인을 로츠 게토로 강제 이주시킨다. 게토는 철조망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로츠 게토에는 강제 노동, 과밀 거주와 기아 삶이었다.
로츠 게토는 유대인을 비유대인 인구로부터 격리한 사례이다.
1941년 10월~11월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 로츠(Łódź) 게토로 유대인 추방
1941년 10월과 11월에 독일 당국은 베를린, 비엔나, 프라하 같은 서유럽과 중유럽 도시에서 약 20,000명의 유대인을 로츠 게토로 추방한다. 대다수는 늙고 병든 자들로 첫 7개월 안에 약 3,000명이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추방이 계속 진행하자 로츠 게토의 삶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과밀 거주를 악화시킨다.
이러한 추방은 1941년 가을 때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이 확대된 부분의 일부이다. 같은 시기에 나치 지도자들은 독일 도시에서 "유대인을 제거"(Judenrein) 하기로 결정한다. 로츠 게토로의 추방은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이다.
1942년 1월 16일
로츠(Łódź) 게토 유대인들을 헤움노 절멸 수용소로 이송
1942년 1월 16일 "최종 해결"의 일환으로 독일 당국은 유대인을 로츠 게토에서 헤움노(Chełmno) 절멸 수용소로 이송하기 시작한다. 헤움노 절멸 수용소는 로츠 게토와 주변 지역의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로츠 시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곳에 건설됐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절멸 수용소에서 가스 처형이 시작된다. 헤움노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동식 가스 밴에서 학살된다.
1944년 여름까지 독일 당국은 헤움노에서 총 167,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한다. 이 중에 로츠 게토에서 온 유대인들은 약 77,000명이었다. 해서 대다수는 로츠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유대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