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와 1940년대의 탄압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찾았던 많은 사람은 미국의 제한적인 이민 할당량과 복잡하고 까다로운 비자 조건 때문에 좌절을 겪게 된다. 당시 미국 여론은 이민자 확대에 부정적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민 정책을 변경하라는 정치적 압력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 문제와 국가 안보를 우선시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Nazis) 라고 알려져 있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당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에서 1921년부터 최고의 지도자로 있었다. 1923년 그는 독일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유명해지면서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그는 이후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이념인 Mein Kampf (나의 투쟁) 를 저술했다.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아리아인이라고 하는 단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유럽어와 다수의 아시아어를 비롯한 다양한 관련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그룹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는 새롭고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부 학자 및 사람들이 아리아인을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신화적인 "인종"으로…
나치당은 독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히틀러 청소년단과 독일 소녀 연맹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나치 이념과 정책을 소개하기 위한 나치당 청소년 단체로 시작되었다. 이 청소년 단체는 독일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대비시킬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재판소, 국내 재판소 및 군사 재판소는 수천 명의 전쟁 범죄자들을 고발하여 재판을 실시하였다. 나치 시대 범죄의 가해자들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은 21세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탄압자들 중에는 재판에 회부되지도 처벌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재판은 중요한 법적 선례를 세웠다.…
우치(Łódź)의 유대인 어린이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가혹한 현실을 겪었다. 다비드 시라코비악(Dawid Sierakowiak)을 비롯한 몇몇 어린이들은 일기에 개인 생활을 기록했다. 이들의 증언은 매욱 어려운 상황에 불구하고 공동체와 젊은이들이 살기 위해 어떠한 투쟁을 했는지 알려준다.
나치는 집권 후 10년 안에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을 살인적 군사조직으로 급진화한다. 질서경찰은 홀로코스트 당시 많은 만행을 자행한다. 게토 경비, 강제 이송, 숨은 유대인 추적, 유대인과 비유대인 학살에 참여한다. 질서경찰은 유럽계 유대인 대량 학살 진도와 잔혹함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33년 1월 30일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는 나치당의 총재였던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총리로 임명했다. 나치당의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이며 당원은 종종 나치라고 부른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우익,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및 반민주주의적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과정에 여러 가지 오해가 있으니 다음 사실을 알고…
나치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은 유럽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대량 학살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되었고 종종 "최종 해결책"(Endlösung)이라고 불린다. "최종 해결책"은 나치 유대인 탄압의 비극적인 절정이었다. 홀로코스트(1933~1945)의 핵심 사헌인 것이다. 나치 독일은 "최종 해결책"을 시행하기 위해 유럽 유대인을 기아,…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무엇인가? 1935년 9월 15일 나치 정권은 두 새로운 법률을 통과했다: 국가시민법(Reichsbürgergesetz, Reich Citizenship Law) 독일인 혈통 명예 보호법(Gesetz zum Schutze des deutschen Blutes und der deutschen Ehre, Law for the Protection of German Blood and German Honor) 이 법률들은 비공식적으로 뉘른베르크법(Nürnberger Gesetze) 또는 뉘른베르크 인종법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유는 독일…
1938년 11월 9시 밤부터 10일 사이 나치 정권은 독일 전국에 반유대적 공격을 조작했다. 이 사건은 깨어진 상점 유리창이 거리에 널려 있는 광경에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알려지게 된다. 계획하지 않은 반유대적 분노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나치 지도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허가로 적극적으로 조작한 것이었다. 11월 9일 밤 나치당의 조직원(SS, SA, 히틀러…
나치는 독일 국민을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나치 사상을 따르기를 원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검열과 선전을 통해 신문, 잡지, 책, 예술, 연극, 음악, 영화, 라디오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제하게 된다. 나치는 어떻게 검열했는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했을 때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독일 헌법에 보장되었다. 하지만 나치는 새로운 법령과 법률로 이러한 시민권을 폐지하고 독일…
홀로코스트는 기록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대량 학살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책으로 인한 정확한 사망자 수를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망자 수가 기록된 단일 전쟁 문서는 없습니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의 두려움이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소수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나치 점령 유럽에서 유태인을 구출하는데 협력하였다. 구출은 여러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1943년 가을, 덴마크 레지스탕스 운동은 선박을 통하여 덴마크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태인을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안전하게 탈출시켰다. 다른 국가에서는, 교회, 고아원 그리고 가족들이 유태인들을…
로츠는 전쟁 전 폴란드에서 바르샤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유태인들의 거주지였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로츠를 점령했다. 1940년 2월초, 독일군은 로츠에 게토를 세우고 약 1.5 평방 마일의 구역에 15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을 몰아 넣었다. 1941년과 1942년에는 약 4만명의 중부 유럽 유태인들과 5,000명의 로마니(집시)들도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1942년 1월부터 9월 사이에 7만 5,000명 이상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을 말살하고자 하는 나치 독일의 계획인 “최종 해결”의 실행에 중심 역할을 하였다. 나치는 유럽의 거의 전 지역의 유태인을 점령지인 폴란드에 세운 아우슈비츠 II(비르케나우)로 이송하였다. 총괄적으로 적어도 1,100,000명의 유태인들과 수만 명의 다른 사람들에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갔다.
나치의 테러에 맞서서 많은 유태인들은 독일과 그 협력자들에게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은 나치가 점령한 동부 유럽의 100여 개소 이상의 게토에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가장 불리한 조건 하의 몇몇 나치 수용소에서도 유태인 수감자들은 그 저항의 맥을 이어갔다. 유태인들은 프랑스, 벨기에,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독일 나치와 그 협력자들이 국가의 비호 아래 조직적으로 유럽의 유태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유태인들이 주요 희생자들 이었으며 600만명이 학살되었다. 로마니(집시), 육체적 및 정신적 장애인들, 그리고 폴란드인 등도 인종, 민족 또는 국적을 이유로 파괴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소련군 전쟁 포로,…
홀로코스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와 그 협력자들이 6백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과 백만 명에 달하는 기타 인종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대량 학살은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과정에서 유태인을 총살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41년 말, 독일은 폴란드 점령지의 대량 학살 수용소로 유태인들을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1945년 5월에는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 약…
연합군은 연속되는 나치 독일의 공격을 뚫고 유럽으로 진군하면서 강제수용소에 이르게 될 때마다 이들 수용소들을 해방 시켰다. 강제 수용소의 죄수들은 죽음의 행군에서 살아남아 독일 내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대부분의 유태인 생존자들은 동유럽으로 귀환할 수 없었거나 귀환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는 반 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지역사회 삶의 터전이…
전쟁 발발 전 독일의 유태인들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중세시대부터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 수백 년 동안 유럽 각국의 사회들처럼 광범위한 박해를 받았다. 독일의 유대인들은 19세기에 기독교인들과 같은 법적 권한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1933년 나치 집권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이미 독일 사회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나머지 독일 사회에 구별할 수 있는…
유대인 불매운동(Judenboykott)은 나치 정권의 첫 반유대정책이었다. 토요일 4월 1일 1933년에 벌어졌다. 이날에 독일인들은 나치당이 유대인들과 관련된 기업이나 상업의 제품들을 구매하면 안되었다. 유대인 의사와 변호사의 사무실들도 방문 하면 안되었다. 나치들은 왜 불매운동을 벌었는가? 나치 대변인은 불매운동의 목적은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한 복수라 주장하였다: 독일계…
크리슈탈나하트(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수정의 밤")은 일반적으로 "산산조각이난 유리의 밤"이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발생한 폭력적 반유태주의 프로그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프로그램은 독일 전역에서 발생했는데, 이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독일 제국 전체에 걸쳐 수백개의 유대교 회당들이 공격을 받고, 훼손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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