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tant view of smoke from the Treblinka killing center, set on fire by prisoners during a revolt. [LCID: 35277]

학살 수용소 봉기

바르샤바 게토의 반란은 다른 게토와 학살 수용소의 봉기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많은 저항군은 막강하게 우세한 독일군에게 패배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들은 싸우면서 죽기로 결심했다.

1943년 5월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마지막 유태인들이 가스실에서 학살된 후, 약 1,000명의 유태인 수감자들이 수용소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조만간에 살해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봉기를 결정했다. 8월 2일, 삽, 곡괭이, 그리고 무기고에서 훔친 약간의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수용소 일부에 불을 지르고는 철조망 울타리를 부수고 도망쳤다. 약 300여명의 수감자들이 탈출에 성공했으며, 이 중 1/3은 독일군의 손에서 벗어나 살아남았다.

소비버의 수감자였던 알렉산드르 페르흐스키(Aleksander Pechersky)와 레온 펠트헨들러(Leon Feldhendler)는 1943년 유사한 봉기를 계획했다. 10월 14일, 수감자들은 11명의 수용소 경비병들을 살해하고 수용소에 불을 질렀다. 약 300여명의 수감자들이 탈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온 수색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들중 단지 50명만 생존해 있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있던 소더코만도의 수감자들은 살해된 시신을 소각하는 일을 담당했던 유태인 특수부대가 그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다. 1944년 10월 7일, 이들 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서 3명의 경비대를 죽이고 화장터를 폭파했다. 수백명의 수감자들이 탈출했지만, 대부분 나중에 다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다이너마이트를 공급한 혐의로 체포된 4명의 여성들은 나머지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대의 낙하문이 열릴 때 23세 로자 로보타(Roza Robota)는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외쳤다.

주요 날짜

1943년 8월 2일
트레블링카 반란

1943년 초 트레블링카 학살 수용소로의 이송이 끝나게 된다. 3월에 독일군은 트레블링카에 작전 1005를 발효한다. 작전 1005는 대량 학살의 모든 증거를 없애라는 독일군 암호명이다. 수감자들은 대형 무덤을 파고 시체를 소각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이러한 작전 명령이 완료될 즈음, 수감자들은 자신들도 살해되고 수용소가 철거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수용소의 저항 지도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1943년 8월 2일, 수감자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몰래 가져 나오지만, 이것을 수용소에 넘겨주기 전에 발각된다.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정문으로 몰려간다. 대다수는 기관총으로 사살된다. 300명 이상이 탈출하지만 대부분은 독일 경찰과 군대에 잡혀서 사살된다.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수감자들은 수용소 대부분에 불을 지른다. 살아 남은 수감자들은 수용소의 존재 흔적을 제거하는 일에 동원된다. 이들 역시 일이 끝난 다음에 사살된다. 결국 1943년 가을에 트레블링카는 철거된다. 이곳에서 87만명~92만 5,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1943년 10월 14일
소비보르 반란

수용소의 학살이 절정에 달한 1942년 가을에 소비보르 학살 수용소에 대한 작전 1005 명령이 실시된다. 1943년 초, 소비보르로 이송되는 수감자 수가 줄어들게 되자 수감자들은 자신들도 조만간 살해되고 수용소가 철거될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수감자들은 1943년 초 저항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이들은 봉기를 일으켜서 수용소에서 대대적인 탈출을 감행할 계획을 세운다. 1943년 10월 14일, 수감자들은 독일 및 우크라이나 경비대를 조용히 살해함으로써 봉기를 일으킨다. 경비대가 총을 쏘면서 수감자들이 정문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자 수감자들은 지뢰밭을 통해 탈출을 감행한다. 약 300명이 탈출에 성공하고 약 100명은 다시 체포되어 사살된다. 봉기가 발생한 후 소비보르는 폐쇄되고 철거된다. 소비보르에서는 통틀어 최소 16만 7,000명의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1944년 10월 7일
아우슈비츠 존더코만도(유태인 특수 작업부대) 반란

1944년 여름에는 44만명 이상의 헝가리계 유태인들이 도착함에 따라 아우슈비츠에서의 가스 학살이 증가하게 된다. 가스 학살이 증가하자 학살 장 근처에서 일하는 존더코만도(특수 작업부대)의 작업이 증가한다. 그러나 1944년 가을, 특수 작업부대의 인원수가 다시 줄어든다. 특수 작업부대원들은 자신들도 살해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봉기를 일으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계획은 근처 공장에서 화약을 밀반입하여 특수 작업부대원들에게 건네준 여성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1944년 10월 7일, 존더코만도 수감자들은 화장터 IV를 폭파하고 다수의 SS 경비대를 죽이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수용소 경비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된다. 모든 존더코만도 대원들이 사살된다. 공장에서 화약을 밀반입한 네 명의 여성 수감자들은 수용소가 해방되기 몇주전인 1945년 1월 6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1945년 1월 17일
헤움노

헤움노는 원래 1943년 3월에 폐쇄되었지만, 로츠 게토의 철수를 진행하는 와중에 1944년 6월 다시 문을 연다. 1944년 7월 중순까지 학살이 진행된다. 1944년 9월 초, 일부 유태인 수감자들은 대량 학살의 증거를 모두 없애는 작전 1005 계획의 일환으로 헤움노의 집단 매장지에서 시체를 파내서 소각하는 일에 동원된다. 소련군이 헤움노 학살 수용소로 진군하는 날 밤, 독일군은 수용소를 버리고 도망가기로 결정한다. 독일군은 수용소를 떠나기 전에 남아 있던 유태인 수감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일부 수감자들은 저항해서 탈출하는데 단 세 명의 수감자만 살아 남는다. 헤움노에서는 최소 15만 2,000명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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