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 Martin Niemoeller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마르틴 니묄러(1892–1984)는 독일의 고명한 루터교 목사였다. 그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 많은 나치 사상에 동조했고 급진 우익 정치 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 개신교에 간섭하자 니묄러는 노골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통치의 마지막 8년을 감옥과 강제 수용소에서 지냈다. 니묄러는 전후에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덮쳤을 때..."라는 발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할 수 있을 거다.

중요 사실

  • 1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대중문화와 담론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종종 전 세계에 일어나는 사회 문제와 논쟁의 문맥에 맞춰진다.

  • 2

    발언은 원래 마르틴 니묄러가 대중 앞에 여러 차례 한 즉석연설에 비롯되어 인용문 종류 다양하다.

  • 3

    이 인용문은 나치가 수백만 명을 투옥, 박해 및 학살한 과정에 침묵한 독일인들도 연루했다는 니묄러의 생각을 나타낸다. 그는 특히 루터파, 개혁파 및 연합교회 전통으로 구성된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해당하는 사실이라고 느꼈다.

인용문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 조합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 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이 인용문은 저명한 독일 목사인 마르틴 니묄러의 발언이다. 때로 시로 잘못 불리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니묄러는 나치즘에 대한 자신의 초기 동조와 궁극적인 마음의 변화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죄책감과 책임감에 대한 그의 강력한 연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심금을 울린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에서 니묄러의 명언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인용문은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USHMM)이 1993년 개관한 이래 상설 전시관에 전시되었다. 처음에 니묄러의 연설은 주 전시관 내의 텍스트 패널에 쓰여 있었다. 오늘에는 기념박물관의 상설 전시관 끝에, 눈에 띄게 걸려있다. 방문객이 마지막으로 읽는 글이며 홀로코스트 과정의 수동성과 무관심을 규탄하는 글이다. 또한 개인의 행동과 무관심의 결과를 더욱 광범위하게 생각하게 강력히 새겨준다. 

인용문의 기원

전후 독일에서 마르틴 니묄러는 나치 정권에 반대하다 박해당한 희생자로 알려져 있었다. 1946년에 그는 연합군 점령하 독일의 서부 지방을 돌면서 강연했다. 니묄러는 많은 나치 희생자의 운명에 대해 자신의 무관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그는 이때 "나는 침묵했다..." 또는 "우리는 조용히 있기로 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나치 정권 초기 몇 년 동안 나치가 다른 독일인들을 박해할 때 침묵했다고 말했다. 당시 다수 희생자는 (보수주의자인) 니묄러가 격렬하게 반대했던 좌파 정치 운동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나치 박해가 니묄러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과 집단으로 확장되었다. 대부분 독일인은 나치의 행위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을 계속 지지하거나 동료들의 곤경을 무시했다.

니묄러는 전후 많은 독일인이 나치즘과 공모관계에 맞서는 것을 꺼렸다고 믿었다. 그는 강연에서 독일 개개인이 나치즘, 점령국에서 저지른 만행, 그리고 홀로코스트에 책임을 인정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그에 관점에는 독일인들이 이웃, 상사 또는 게슈타포와 같은 나치 조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니묄러는 주로 독일 국민들 앞에 연설했다. 자기 말을 통해 나치 정권과 공모한 개인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되기를 원했다. 

니묄러의 인용문에 여러 종류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Martin Niemöller, a prominent Protestant pastor who opposed the Nazi regime.

마르틴 뉘밀러(Martin Niemöller), 나치 통치에 반대한 저명한 목사 그는 나치 통치 마지막 7년을 집단 수용소에서 보냈다. 독일, 1937년.

Credits:
  • Bildarchiv Preussischer Kulturbesitz

니묄러는 종종 즉흥적으로 연설했고 연설마다 희생자 주제를 변경했기 때문에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인용문은 여러 종료가 존재한다. 니묄러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 조합원, 유대인, 여호와의 증인, 정신적 신체적 장애인을 연설마다 다양한 조합으로 나열했다. 

일부 인쇄본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니묄러는 처음에 개신교를 포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개신교 성직자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시달리고 있을 때 침묵하지 않았다. 좌파 정치 운동의 구성원과는 달리 개신교 성직자는 니묄러가 동질감을 느끼고 동정하는 독일 국민이었다. 또한 니묄러가 가톨릭 신자를 포함했을 가능성은 작다. 그에 따르면 나치는 1937년 그가 체포된 이후까지 지속적인 박해를 위해 가톨릭 신자들을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니묄러는 그의 강연에서 이러한 교단의 개별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정부에 반발한 사연들에 대해 말은 했다.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지 상관없이 니묄러의 교훈은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침묵, 무관심, 그리고 무대응 때문에 독일인들은 나치가 수백만 명에게 자행한 감금, 박해 및 학살로부터 연루했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도덕적 권위를 갖춘 개신교 지도자들의 침묵이 특히 끔찍하다고 느꼈다. 

오늘날, 이 인용문은 공개 토론과 심지어 대중문화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시, 고백서 또는 격언이라고 다양하게 언급되기도 한다. 또한 항상 니묄러의 본래 의도에 맞추어 사용되는 것은 아니어서 정치적 용도로 자주 채택되어 변경되기도 한다. 

마르틴 니묄러는 누구였는가?

마르틴 니묄러는 1892년 1월 14일 독일 제국에서 태어났다. 21세에 그는 독일 제국 해군에서 장교로서 근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니묄러는 U보트(잠수함) 장교로 복무했다. 협상군 함선을 침몰시킨 공로로 1917년에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니묄러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자 반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고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서 망연자실했다.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이라 불리는 전후 새로운 독일 정부에 강력히 반대했다. 니묄러는 새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것을 꺼리면서 1919년 해군에 사임했다. 

1920년에 뮌스터 대학교(Universität Münster)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1924년 루터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 우익 및 반유대주의 정당 및 조직에 참여했다.

니묄러는 나치 정권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니묄러는 우익,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유지하면서 1933년 제3제국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해 3월 선거에서 나치당을 투표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새 정부에 향한 니묄러의 열정은 나치 정권이 교회 정책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시들었다. 1933년에 히틀러는 개신교 내의 급진파인 "독일 기독교인" (Deutsche Christen) 운동을 지지했다. 이 파벌은 나치즘과 기독교를 융합하기를 원했다. 독일 기독교인은 예수를 유대인이 아닌 아리아인으로 묘사했다. 또한 성경의 일부를 바꾸거나 버리려고 했다. 그들의 목적은 기독교에서 "유대적 요소"로 간주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개신교에 목회하는 유대인 혈통의 목사를 제거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니묄러는 "독일 기독교인"과 히틀러의 교회 정책의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나치 정권에 향한 니묄러의 태도는 1934년 1월 아돌프 히틀러와 만난 이후 크게 달라졌다. 니묄러와 다른 저명한 개신교 지도자들은 히틀러를 만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니묄러의 전화가 게슈타포의 도청당했고 1933년에 니묄러가 설립했던 목회자 비상 연맹(Pfarrernotbund)이 국가의 면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히틀러의 적대감을 확신한 니묄러는 개신교가 나치의 신념에 적극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이상 개신교 교회와 나치국은 조화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니묄러는 나치와 타협할 생각이 없어졌다. 

결국 니묄러는 나치 교회 정책에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었다. 1937년 7월 1일, 게슈타포는 니묄러를 체포하여 8년 동안 정치범으로 수감했다. 국외의 많은 종교 지도자가 그의 석방을 촉구했다. 그러나 니묄러는 연합군이 나치 독일에 승리를 거둔 1945년 5월까지 석방되지 않았다.

오래 이어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유산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반나치 행보로 명성을 날린 니묄러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사가 되었다. 그는 노골적인 견해로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전후 연합국이 진행하던 탈나치화 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정책에서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믿었다. 또한 냉전 시대에서 명백하게 미국 편에 서는 것을 거부했다. 그 결과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니묄러는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 및 교회가 나치 시대에 저지른 도덕적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저명한 독일인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 박해와 학살과 관련하여 독일인의 책임과 무관심 사이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계속 언급했다.

Footnotes

  1. Footnote reference1.

    예를 들어, 1980년 이후 출판된 Bartlett’s Familiar Quotations 판본과 The Yale Book of Quotations(2006) 및 The Oxford Dictionary of Quotations(2004)가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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