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meeting of the board of directors of the War Refugee Board. [LCID: 85936]

전쟁 난민 위원회

미국은 전쟁의 막바지에 도달해서야 홀로코스트에서 유태인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다. 1944년 1월, 재무부 장관인 헨리 모겐소 2세(Henry Morgenthau, Jr.)는 플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쟁 난민 위원회를 설립하도록 설득했다.

미국 국무부가 유태인의 대량 학살에 대한 확인된 보고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국무부는 나치 독일 정책의 피해자들을 구하는 가장 좋은 길은 가능한한 빨리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난민 위원회는 유태인 조직, 중립국 외교관, 그리고 유럽의 저항 단체 등과 연합해서 독일 점령지로부터 유태인들을 구출하고 나치 집단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 구호품을 제공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스웨덴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르그(Raoul Wallenberg)는 가장 광범위한 구출 활동을 이끌었다. 발렌베르그는 스웨덴 보호 여권을 배포하면서 수만 명의 헝가리계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독일은 스웨덴 국민에게 쉽게 해를 가할 수 없었다. 발렌베르그는 부다페스트의 유태인을 위한 병원, 보육원 및 급식 시설도 설립했다.

전쟁 난민 위원회는 20만명에 달하는 유태인들의 구출 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구조 활동이 더욱 빨리 시작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유태인들을 추가로 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라울 발렌베르그는 소련이 부다페스트를 해방하는 동안 사라졌다. 그는 1945년 1월 17일에 소련군 사이에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누군가 목격했다. 10년 후, 소련은 발렌베르그를 체포했으며 1947년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주요 날짜

1944년 1월 13일
행동을 취하는 미국

1943년과 1944년 초에 유럽 유태인의 대량 학살에 대한 기사가 점점 더 많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미국 정부는 유럽에서의 구출 활동을 강화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게 된다. 1944년 1월 13일, 재무부는 구출 활동에 있어서 상당히 미온적인 미국무성 태도를 비난한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유럽의 유태인들을 구출할 정부 위원회를 설립하도록 촉구한다. 1944년 1월 22일, 루즈벨트는 전쟁 난민 위원회(WRB)를 설립하는 실행 명령 9417에 서명한다. 위원회는 탄압 피해자의 구출 및 구호와 관련하여 미국 정부의 정책을 강화하도록 하는 업무를 전담한다. 여기에는 피난처의 설치, 나치 점령지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대피, 그리고 집단 수용소에 구호 물자 공급 등이 포함된다. 유럽에 있는 미국 외교관들은 실행 명령에 명시된 모든 정책을 시행하도록 지시를 받는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위원회는 약 20만명의 유태인들을 구출하는 일에 도움을 주게 된다.

1944년 6월 9일
미국에서 난민을 위한 명목상 피난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기자 회견에서 뉴욕주 오스웨고에 있는 포트 온타리오에 비상 난민 수용소를 개소했다고 발표한다. 미국에 이러한 "자유 항구"가 설치된다는 것이 미국 이민 정책의 대대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용소의 난민 중에는 많은 수의 비 유태인들과 나치 점령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주로 해방된 남부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1944년 8월 포트 온타리오에는 1,000명에 가까운 난민들이 도착한다. 이들은 미국에 손님으로 간주되며 기본적으로 전쟁이 끝나면 유럽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난민들은 수용소 보안 제한 사항에 따라 생활해야하고 수용소 외부에서 일하는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1945년 12월 22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상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트 온타리오에 수용된 난민들이 영주권 비자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미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허가 한다고 발표한다. 포트 온타리오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이 자국 영토에서 난민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려고 한 유일한 시도였다.

1944년 7월 9일
부다페스트의 라울 발렌베르그

중립국 스웨덴의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르그(Raoul Wallenberg)가 스웨덴 공사관과 전쟁 난민 위원회(WRB)의 지시로 부다페스트의 유태인들을 구조 및 구호하는 활동을 돕기 위해 부다페스트에 도착한다. 발렌베르그가 도착할 즈음, 독일은 약 44만명의 유태인들을 헝가리로부터 이송한 상태였다. 부다페스트에 남아 있는 유태인들은 20만명이며 이들 또한 이송될 운명이었다. 발렌베르그는 스웨덴 보호 통행증을 발급하고 유태인들을 스웨덴의 보호 아래에 있는 거주지로 옮긴다. 1944년, 독일이 유태인들을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죽음의 행진을 시작할 때, 발렌베르그는 행진을 뒤쫓아 가면서 보호 증명서를 가진 유태인들을 찾아 부타페스트의 안전한 거주지로 되돌려 보낸다. 1944년 말, 부다페스트의 게토에는 약 7만명의 유태인들이 모이게 된다. 발렌베르그는 게토를 파괴하고 그 거주민을 몰살하려는 독일 및 헝가리 정부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막아 낸다. 다른 중립국의 외교관들도 발렌베르그의 구출 노력에 동참한다. 1945년 1월, 라울 발렌베르그는 소련이 점령한 부다페스트를 떠나게 되고,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을 들은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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