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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 전 독일의 유대인들

    기사

    전쟁 발발 전 독일의 유태인들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중세시대부터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 수백 년 동안 유럽 각국의 사회들처럼 광범위한 박해를 받았다. 독일의 유대인들은 19세기에 기독교인들과 같은 법적 권한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1933년 나치 집권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이미 독일 사회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나머지 독일 사회에 구별할 수 있는…

    전쟁 전 독일의 유대인들
  • 유대인 상업 불매운동

    기사

    유대인 불매운동(Judenboykott)은 나치 정권의 첫 반유대정책이었다. 토요일 4월 1일 1933년에 벌어졌다. 이날에 독일인들은 나치당이 유대인들과 관련된 기업이나 상업의 제품들을 구매하면 안되었다. 유대인 의사와 변호사의 사무실들도 방문 하면 안되었다. 나치들은 왜 불매운동을 벌었는가? 나치 대변인은 불매운동의 목적은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한 복수라 주장하였다: 독일계…

    유대인 상업 불매운동
  • 다비드 시라코비악(Dawid Sierakowiak)

    기사

    우치(Łódź)의 유대인 어린이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가혹한 현실을 겪었다. 다비드 시라코비악(Dawid Sierakowiak)을 비롯한 몇몇 어린이들은 일기에 개인 생활을 기록했다. 이들의 증언은 매욱 어려운 상황에 불구하고 공동체와 젊은이들이 살기 위해 어떠한 투쟁을 했는지 알려준다.

    다비드 시라코비악(Dawid Sierakowiak)
  • 질서경찰

    기사

    나치는 집권 후 10년 안에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을 살인적 군사조직으로 급진화한다. 질서경찰은 홀로코스트 당시 많은 만행을 자행한다. 게토 경비, 강제 이송, 숨은 유대인 추적, 유대인과 비유대인 학살에 참여한다. 질서경찰은 유럽계 유대인 대량 학살 진도와 잔혹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질서경찰
  •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다

    기사

    1933년 1월 30일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는 나치당의 총재였던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총리로 임명했다. 나치당의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이며 당원은 종종 나치라고 부른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우익,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및 반민주주의적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과정에 여러 가지 오해가 있으니 다음 사실을 알고…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다
  •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

    기사

    나치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은 유럽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대량 학살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되었고 종종 "최종 해결책"(Endlösung)이라고 불린다. "최종 해결책"은 나치 유대인 탄압의 비극적인 절정이었다. 홀로코스트(1933~1945)의 핵심 사헌인 것이다. 나치 독일은 "최종 해결책"을 시행하기 위해 유럽 유대인을 기아,…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
  • 뉘렌베르크 인종법(Nürnberger Rassengesetze, Nuremberg Racial Law)

    기사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무엇인가?  1935년 9월 15일 나치 정권은 두 새로운 법률을 통과했다: 국가시민법(Reichsbürgergesetz, Reich Citizenship Law) 독일인 혈통 명예 보호법(Gesetz zum Schutze des deutschen Blutes und der deutschen Ehre, Law for the Protection of German Blood and German Honor) 이 법률들은 비공식적으로 뉘른베르크법(Nürnberger Gesetze) 또는 뉘른베르크 인종법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유는 독일…

    뉘렌베르크 인종법(Nürnberger Rassengesetze, Nuremberg Racial Law)
  • "수정의 밤"(Kristallnacht, Night of the Broken G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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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11월 9시 밤부터 10일 사이 나치 정권은 독일 전국에 반유대적 공격을 조작했다. 이 사건은 깨어진 상점 유리창이 거리에 널려 있는 광경에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알려지게 된다. 계획하지 않은 반유대적 분노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나치 지도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허가로 적극적으로 조작한 것이었다. 11월 9일 밤 나치당의 조직원(SS, SA, 히틀러…

    "수정의 밤"(Kristallnacht, Night of the Broken Glass)
  • 나치 선전과 검열

    기사

    나치는 독일 국민을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나치 사상을 따르기를 원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검열과 선전을 통해 신문, 잡지, 책, 예술, 연극, 음악, 영화, 라디오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제하게 된다. 나치는 어떻게 검열했는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했을 때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독일 헌법에 보장되었다.  하지만 나치는 새로운 법령과 법률로 이러한 시민권을 폐지하고 독일…

    나치 선전과 검열
  • 미국과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

    기사

    1944년 봄에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가스를 이용한 대량 학살 행위에 대한 더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다. 어떤 날은 약 10,000여 명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유태인 단체들은 학살 행위의 중단과 유럽에 남아있는 유태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일부 유태인 지도자들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지도자들은 그…

    미국과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
  • 미국과 홀로코스트: 종전 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미국의 반응

    기사

    1945년과 1951년 사이, 홀로코스트 여파로 미국은(영국과 함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및 체코슬라비아의 점령지에서 1945년 하반기를 정점으로 약 25만여 명에 달하는 유태인들을 포함한 100만여 명의 난민들(DP)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유엔 국제부흥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gency)와 다양한 민간 구호 기관들은 이와같은 엄청난 과제를 서방 연합군이 감당할 수…

  • 민족적 단합

    기사

    위기의 독일 정부1919년부터 1932년까지 일련의 연합 정부가 독일을 통치하였는데 이를 독일 역사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어떤 특정한 정당도 의회의 다수를 차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 정책의 불일치를 비롯한 좌익과 우익 정당의 정치적 양극화는 제대로 일 할 수 있는 단합된 정당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반면 1930년 6월 이후, 수상 후임자들는…

    민족적 단합
  •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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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는 현대 폴란드의 수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 도시는 유태인의 생활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바르샤바의 전전(戰前) 유태인 인구는 350,000명 이상이었으며, 도시 전체 인구의 약 30퍼센트를 구성하였다. 바르샤바 유태인 지역사회는 유럽 내 최대 규모였으며, 전 세계에서도 뉴욕시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바르샤바는 심한…

  • 바르샤바 게토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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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유럽 전체의 게토에 남아있던 많은 유태인들은 독일군에 저항하기위해 밀수한 무기나 사제 무기로 무장한 저항군을 조직했다.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약 100여개의 유태인 단체를 통해서 지하 저항 운동이 형성되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독일군에 대한 저항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있었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1942년 여름, 약 30만명의 유태인들이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로…

    바르샤바 게토 봉기
  •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사

    1942년 7월 22일부터 9월 12일까지 독일 당국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약 300,000명의 유태인들을 이송하거나 학살했다. SS와 경찰 부대는 265,000명의 유태인들을 트레블링카 학살 수용소로 보냈고 11,580의 유태인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냈다. 독일군과 조력자들은 이송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000명 이상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독일 당국은 단 35,000명의 유태인들만…

    바르샤바 게토 봉기
  • 반 유태주의

    기사

    반 유태주의는 유태인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일컫는 단어이다. 홀로코스트란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유럽 유태인에 대하여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이 일으킨 국가적 차원의 박해와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것으로 반 유태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879년, 독일의 언론가인 빌헬름 마르(Wilhelm Marr)가 처음으로 반 유태주의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태인에…

  • 반 유태주의

    기사

    반 유태주의란 유태인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일컫는 단어이다. 홀로코스트란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유럽 유태인에 대하여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이 일으킨 국가적 차원의 박해와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것으로 반 유태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879년, 독일의 언론가인 빌헬름 마르(Wilhelm Marr)가 처음으로 반 유태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반 유태주의
  • 반유태주의

    기사

    반유태주의는 홀로코스트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닥친 비극을 이해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태인들은 반유태주의라는 편견과 차별을 겪어 왔다. 지금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땅에서 약 2천년 전에 로마인에 의해서 쫓겨난 유태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서 소수 민족으로 살면서 그들의 독특한 믿음과 문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일부 국가에서…

    반유태주의
  • 반제 회의와 "최종 해결"

    기사

    1942년 1월 20일, 나치당과 독일 정부의 고위급 지도자 15명이 중요한 회의를 위해 모였다. 이들은 베를린의 부촌에 있는 반제라고 하는 호수 근처의 빌라에서 회의를 열었다. 독일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수석 부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유럽에서 골칫거리인 유태인에 대한 최종 해결"을 외무부 및 법무부 장관을 비롯하여 핵심적인 비 친위대 정부 리더들과 논의하기…

    반제 회의와 "최종 해결"
  • 반제 회의와 "최종 해결"

    기사

    1942년 1월 20일, 15명의 고위급 나치당원 및 독일 정부 임원들이 베를린 교외 반제에 있는 별장에 모여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라고 칭한 것의 수행 여부에 대해 논의하였다. "최종 해결"은 유럽계 유태인의 체계적이고, 고의적이며, 육체적 말살을 칭하는 암호명이었다. 1941년 어느 시점에 아돌프 히틀러가 대량 살상을 위해 이 계획을 승인하였다. 독일 친위대 장군인 라이나르트…

  • 베르겐-벨젠

    기사

    독일 군 당국은 1940년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건설하였는데, 독일 셀레에서 북쪽으로 약 17km 떨어진 베르겐과 벨젠의 작은 마을 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기존 부지에 여러 기간에 걸쳐 건설된 다수의 수용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개의 주요 수용소는 전쟁포로 수용소, "거주 수용소," "수감자 수용소"이다. 1943년까지, 베르겐-벨젠은 전적으로 전쟁포로(POW)…

  • 베르제크

    기사

    1941년 11월, 독일 당국은 남동부 폴란드 점령지의 이전 수용소 부지에 학살 수용소 건설을 시작하였다. 두 번째 독일 학살 수용소인 베르제크는 1942년 3월 17일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1942년 3월과 12월 사이에 독일인들은 약 434,500명의 유대인과 확인되지 않은 수의 폴란드 기독교도 및 로마니(집시)를 베르제크로 수송한 다음, 이곳에서 학살하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남부 폴란드의…

  • 보도 기사 작성

    기사

    한 때 기자였던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전쟁 중에 언론의 독립성 상실에 대하여 그의 일기(1943년 4월 14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마지막 남은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기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였을 때 독일의 언론은 매우 훌륭한 구조적 체계를 이룩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매년 4,700여 개가 넘는 일간지와 주간지가 출판되고…

    보도 기사 작성
  • 부속 뉘렌베르그 소송 절차

    기사

    뉘렌베르그에서의 국제 군사 법정(IMT) 이후, 미국 장군 텔포드 테일러는 부속 뉘렌베르그 소송으로 알려진 절차의 수석 검사로 임명되었다.국제 군사 법정(IMT)이 이미 전쟁 범죄, 침략 전쟁, 반 인도적 범죄의 범죄성을 확립한 상태였으므로, 차후 소송은 그러한 범죄로 기소된 2등급 나치의 유죄 여부를 결정할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미국은 12건의 부속 뉘렌베르그 소송에서 총 183명의…

  • 부헨발트

    기사

    인근의 많은 부속 수용소들을 합치면, 부헨발트는 나치가 건설한 가장 큰 수용소 중 하나이다. SS 당국은 1937년 7월, 독일 중동부 바이마르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부헨발트를 개소하였다. 수감자는 수용소의 북부("주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경비대 막사와 수용소 관리소는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울타리, 망루, 기관총을 갖춘 일련의 보초들이 주요…

  • 비 유태인들의 저항

    기사

    1933-1945년 사이, 독일과 독일이 점령한 영토에서 다양한 그룹이 나치 정권에 저항했다. 독일에서 나치주의에 반대한 가장 초기의 반대자들 중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및 노동 조합 지도자들이 있었다. 1944년 7월, 독일 정치인과 군사 지도자로 이루어진 한 그룹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암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하였다. 프랑스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태그: 저항 반나치
  • 비 유태인의 저항: 개요

    기사

    1933년부터 1945년 사이, 수천 명의 사람들이 폭력적 방법과 비폭력적 방법을 사용하여 나치에 저항하였다. 독일에서 나치주의에 반대한 가장 초기의 반대자들 중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사회 민주주의자 및 노동 조합 지도자들이 있었다. 주류 교회의 상류층들은 나치 정권을 지지하거나 그 정책을 묵인하였으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와 같은 개별 독일 신학자들은 나치…

  • 비엘스키 유격대

    기사

    배경 1942년에서 1944년까지 벨로루시 서쪽(벨라루스)에서 활동 중이었던 비엘스키 유격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싸웠던 가장 강력한 유태인 저항세력을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비엘스키 유격대 대원들이 독일군과 그들의 협력자들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비엘스키 유격대의 지도자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숲으로 도망쳤던 유태인들, 특히 여자와 어린이들과…

    태그: 저항
    비엘스키 유격대
  • 생존자들

    기사

    생존자들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태인 커뮤니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용소나 다른 은신처로부터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집은 약탈되었거나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위험했다. 종전 후 폴란드의 여러 도시에서는…

    생존자들
  • 서적 소각

    기사

    "서적 소각"은 서적을 의식에서 불태워 파손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공개적으로 수행된 서적 소각은 해당 자료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인 반대에서 비롯된다. 1933년 나치의 대중 각성 및 선전부 장관인 요제프 괴벨즈는 독일 예술 및 문화를 나치의 목적에 부합시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정부는 유태인 문화 단체들과 정치적 의혹이 있거나 나치가 "타락"한 것으로 규정한 예술…

  • 서적 소각

    기사

    "서적 소각"은 서적 또는 기타 기록물들을 불태워 파손하는 의식적인 행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보는 앞에서 행해지는데, 서적 소각은 검열의 요소를 제시하며 해당 자료가 문화적, 종교적 또는 정치적 반대 성향을 갖고 있음을 의심하는것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서적 소각은 어둡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손꼽히는 1933년 5월 10일 나치 정권 하의…

    서적 소각
  • 선전

    기사

    나치 정권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복 전쟁을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전을 활용하였다. 인종주의 및 반 유태주의 선전은 유럽계 유태인 말살을 수행한 이들을 고무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선전은 또한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종 탄압과 대량 학살을 묵인하도록 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아돌프 히틀러는 요제프 괴벨스를 장관으로 하는…

    태그: 선전 제3제국
  • 세인트 루이스의 항해

    기사

    독일 여객선인 세인트 루이스의 항해는 나치 테러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처한 어려움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세인트 루이스는 1939년 5월, 대부분이 유태인 난민인 937명을 태우고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쿠바로 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미국으로의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입국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모든 승객들은 쿠바로의 입국을 허가하는 입국 허가서를…

    태그: 난민배
    세인트 루이스의 항해
  • 소비보르

    기사

    1942년 봄, 독일 SS와 경찰 당국은 현재 폴란드 동부 국경 근방에 위치한 습지이자 인구가 적은 지역에 소비보르 학살 수용소를 건설하였다. 이 수용소의 규모는 최대 1,312 x 1,969 피트에 달하였다. 주변에 심은 나무들로 부지를 은폐하였으며, 전체 수용소는 15미터(50 피트) 너비의 지뢰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소비보르의 수용소당국은 소수의 독일 SS와 경찰 및 90 에서 120 명의 전 소련…

  • 수용소 수감자들

    기사

    유태인이 나치 인종 학살의 중심 대상이었기 때문에, 학살 수용소의 희생자도 압도적으로 유태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가스실이 갖춰져 있지 않은 수백개의 강제 노동 및 집단 수용소에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수감자들은 색깔로 구분되는 삼각형을 겉옷에 부착하도록 해서 수용소의 경비대와 장교가 각 사람의 배경을 쉽게 파악하고 서로 다른 그룹을…

    수용소 수감자들
  • 수정의 밤(Kristallnacht)

    기사

    전국적 포그롬(대박해) 수정의 밤은 "산산조각난 유리의 밤"이라고도 한다. 이 이름은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발생한 폭력적인 반유태주의 포그롬 운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폭력적인 운동은 독일, 합병된 오스트리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군이 최근 점령한 수데텐란트 지역 전역에 걸쳐 발생했다. 수정의 밤 이름의 어원 수정의 밤이라는 이름은 포그롬이 발생하자 폭력이…

    수정의 밤(Kristallnacht)
  • 스와스티카의 역사

    기사

    스와스티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깃발의 디자인으로 사용하기전 최소한 5,000년전에 사용되었다. 스와스티카라는 단어의 어원은 범어로 "행운" 또는 "복지"를 의미하는 스바스티카에서 온것이다. 주된 문양(꺾어진 십자가)은 신석기 시대 유라시아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하늘을 통과하는 태양의 이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스와스티카의 역사
  • 시온 장로 의정서

    기사

    "만약 한 책이 대중의 증오심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이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책은 거짓과 중상 모략에 관한 것이다."—노벨 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Elie Wiesel) 시온 장로 의정서는 오늘날 가장 널리 배포된 악명 높은 반유태주의적 간행물이다. 이 책에는 유태인들을 불명예스럽게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을 통해 오늘날까지 같은 내용을 순환시키고 있다. 이…

    시온 장로 의정서
  • 시온 장로 의정서: 연대표

    기사

    이 연대표에는 오늘날 가장 널리 배포된 반유태주의적 간행물인 시온 장로 의정서가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온 의정서는 세계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유태인 지도자들이 모여 꾸민 음모에 대해 기록한 비밀 회의록으로 알려져 있다. 음모와 그 지도자들, 소위 말하는 시온의 장로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온 의정서는 여러 사례에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으나, 유태인에 대한…

    시온 장로 의정서: 연대표
  • 아돌프 아이프만

    기사

    아돌프 아이프만은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럽의 유태인 수송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독일 출생이기는 하나,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로 이주하였다. 1932년, 아이프만은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SS에 가담하였고, 나치 조직 내에서 빠른 속도로 진급하였다.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아이프만은 비엔나에서 유태인 이민국을 조직하여 1938년 8월과 1939년…

  • 아우슈비츠

    기사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나치 제국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대규모의 수용소였다. 여기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들 수용소는 모두 수감된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곳이었다. 이 중 한 군데는 집단 학살 수용소로서 나중까지 존재하였다. 이 수용소는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 37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 하였는데, 전쟁 전 독일-폴란드 접경 지역인 북부…

    아우슈비츠
  • 아우슈비츠

    기사

    아우슈비츠는 독일이 세운 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큰 수용소였다. 이 곳에는 집단 수용소, 학살 수용소, 그리고 강제 노동 수용소가 모두 집결되어 있었는데, 폴란드의 크라쿠프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I, 아우슈비츠 II(비르케나우), 그리고 아우슈비츠 III(모노비츠)의 세 군데 대형 수용소로 구성되었다.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아우슈비츠
  • 아우슈비츠

    기사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나치 제국이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대규모의 수용소였다. 여기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들 수용소는 모두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 중 한 수용소는 학살 수용소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1940년 5월 아우슈비츠(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서 건설이 시작되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SS와 독일 경찰은…

  • 아인자츠그루펜(이동 학살 부대)

    기사

    아인자츠그루펜(이동 학살 부대)는 기본적으로 독일 SS와 경찰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독일 치안 경찰(Sicherheitspolizei; Sipo)과 치안 서비스(Sicherheitsdienst; SD) 간부의 명령 하에 아인자츠그루펜은 소련 지역의 독일 전선 후방인 독일 점령지에서의 인종적 적대 세력과 정치적 적대 세력의 학살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에게 희생된 희생자에는 유태인, 로마니(집시) 및 소련과 소련 공산당…

    아인자츠그루펜(이동 학살 부대)
  • 아인자츠그루펜(이동 학살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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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자츠그루펜(이동 학살 부대)은 기본적으로 독일 SS와 경찰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 시, 이동 학살 부대원들은 독일군과 함께 소련 지역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종종 지역 경찰의 지원 아래 지방의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하였다. 이들에게 희생된 희생자에는 유태인, 로마니(집시) 및 소련과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 안네 프랑크(Anne F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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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네 프랑크는 홀로코스트에서 사망한 백만 명 이상의 유태인 어린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은신처에서 거주하는 동안 안네는 자신의 공포와 희망 그리고 은신처에서의 경험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이 일기는 프랑크 가족을 숨겨주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인 미에프 기스가 프랑크 가족이 체포된 후 은신처에서 발견하고 보관하고 있었다. 안네의 일기는 전쟁이 끝난 후 세계 각국의 언어로…

  • 안네 프랑크(Anne F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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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네 프랑크는 홀로코스트에서 사망한 백만 명 이상의 유태인 어린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아넬리스 마리 프랑크는 1929년 6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버지 오토와 어머니 에디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네는 5세까지 부모님과 언니, 마고(Margot)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1933년, 나치가 세력을 잡자 오토 프랑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도피하여…

    안네 프랑크(Anne Frank)
  • 안락사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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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락사"(문자적으로, "좋은 죽음")라는 용어는 보통 만성적이거나 불치의 병을 앓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통 없이 죽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치 시대에 "안락사"는 독일과 독일에 합병된 영토의 시설에서 살고 있는 장애 환자들을 은밀히 살해하는 프로그램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이 프로그램은 나치 독일이 대량 학살에 사용한 첫 번째 정책이었다. 유럽계…

  • 에비앙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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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나치는 독일을 유데라인(유태인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이들의 삶을 어렵게 해서 독일을 떠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1938년에는 네 명에 한 명꼴로 15만명의 독일 유태인이 이미 독일을 떠났다. 그러나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18만 5,000명의 유태인이 추가적으로 나치의 통치 하에 있게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자신들을 받아 줄 나라를 찾지…

    태그: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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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홀로코스트 이미지의 오용: 반유태주의는 언제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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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나치 선전의 상징(어금꺾쇠 십자표지)과 학살에 연관된 물질적 증거 또는 장소(가시 철사 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학살 수용소로 이어지는 철로)등과 같은 홀로코스트 시대의 많은 이미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적 아이콘의 편재와 흐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반영한다:1) 홀로코스트 시대에 지은 범죄가 유발한 공포 2) 지속적인 나치 선전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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