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zi officials and Catholic bishops listen to a speech by Wilhelm Frick

독일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의 역할

유대인과 다른 집단의 박해는 히틀러와 나치당 열성 당원부터 비롯된 결과가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나치 지도자들은 나치즘을 확신하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적극적인 도움이나 협력이 필요했다. 교회 지도자들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수 엘리트들은 유대인 박해에 대해 거의 침묵했다.

중요 사실

  • 1

    대부분 독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1933년 나치즘의 발흥을 지지했다.

  • 2

    나치즘과 유대인 박해에 교회의 반응은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형성되었다. 또한 기독교 전통 내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에도 기초도 있었다.

  • 3

    기독교 지도자들은 다른 독일 지도자 및 전문과처럼 나치 정권 초기부터 유대인 박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사건에 연루되었다.

많은 독일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도자 및 성직자들은 유대인 박해에 연루되었다.

Adolf Hitler addresses an SA rally, Dortmund, Germany, 1933

나치 돌격대원 (SA) 집회에서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 1933년, 독일, 도르트문트. 

Credits:
  •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courtesy of William O. McWorkman

대부분 독일 기독교 지도자들은 1933년에 나치즘의 발흥을 환영했다. 그들은 혐오 발언이나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들은 1933년 이후 유대인의 권리를 점진적으로 박탈하는 법적 조치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 특히 주 개신교 교회의 극단적 민족주의적인 "독일 기독교" 운동에 개입한 지도자들은 나치 정권을 열렬히 지지했다.

일반적으로 외딴 교구에서 활동한 소수의 종교 지도자, 목사, 사제만이 나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고, 독일계 유대인 박해를 비난하는 설교를 했으며, 유대인을 돕거나 숨겨주었다. 지도자와 기관의 지원이 없이 낸 반대의 목소리는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전국 교회들은 인종법을 시행하는 노력에 도왔다. 정권은 교회가 제공한 가족 세례 기록으로 개개인뿐만 아니라, 부모와 조부모의 인종 신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유대인 박해에 교회의 반응은 기독교 역사에 뿌리 깊은 전통적 종교 반유대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고조되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포함하여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동향에 영향을 받았다. 교회는 공산주의기 기독교의 반대로 보았다. 그들은 특히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독일 내에 좌익 혁명 운동으로 이어질 공산주의 혁명을 우려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탄압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와 지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치즘의 인종적 민족주의와 이교도적 신념에 대한 역겨움보다 능가했다.

독일 역사에 로마 가톨릭교회 박해와 1933년 이전에 온건 정치 입장을 취한 (가톨릭 “중앙당”이 바이마르 시대에 연립 정부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유로 가톨릭 지도자들은 나치당을 비교적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들은 학교에서 청소년 단체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기관을 보존하는 노력에 집중했다. 그리고 일부 개신교 교회와 마찬가지로 나치 인종법에 따라 박해를 받는 세례 받은 유대인 후손들을 보호했다. 가톨릭 지도자들은 피임을 금지하는 종교적 교리를 따라 장애인 강제 불임 수술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일부 가톨릭 지도자들과 개신교 지도자들도 전시 중 "안락사" 학살 시설에 수용된 독일인들을 죽이는 것에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1938년 11월 9~10일, 나치 지도자들은 독일과 최근 병합한 영토의 유대인을 향해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하는 일련의 포그롬을 일으켰다.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폭동에 공개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이들은 비공개적으로 반대했음에도 이러한 폭동에 침묵했던 대학, 기업군사 지도자들처럼 연루되었다. 하지만 수정의 밤이 발생한 후에 교회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냈다고 해도, 아마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 1930년대 말까지 나치 정권은 공개 토론과 공공장소를 완전히 통war제했다. 재판 없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는 것부터 사형에 이르기까지 억압의 수단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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