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George Kadish (formerly Zvi Kadushi), posing with a photograph he took of an inscription written by a Jew during the pogrom in the Slobodka district of Kovno in July 1941. The Yiddish inscription reads: "Jews, avenge."

조지 카디쉬(George Kadish)

조지 카디쉬는 리투아니아 코브노(Kovno) 게토의 생활을 비밀리에 기록했다. 이것은 홀로코스트 시대 게토 생활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진 기록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중요 사실

  • 1

    카디쉬는 전쟁 전에 코브노의 히브리어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 2

    열정적인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카디쉬는 1941년 코브노의 유대인에 대한 최초의 폭력을 목격하고는 그들의 시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3

    그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게토 생활을 사진으로 찍었고, 때로는 외투의 단춧구멍을 통해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조지 카디쉬(George Kadish)는 1910년 리투아니아 라세이니아이(Raseiniai)에서 즈비 (히르쉬) 카두신(Zvi (Hirsh) Kadushin)으로 태어났다. 그는 지방 히브리어 학교에 다닌 후 가족과 함께 코브노(Kovno, 현재 카우나스)로 이사했다. 코브노 교외에 있는 알렉산소타스(Aleksotas) 대학에서 교직을 준비하기 위해 공학을 공부했으며 베이타르(Betar) 우익 시온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히브리어 고등학교에서 수학, 과학 및 전자공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취미생활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사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지 벨트에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 같은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브노 게토에서

코브노 게토는 파네루 거리(Panerių Street)에서 구분된 "소게토"와 "대게토"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게토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철저하게 감시되었다. 둘 다 과밀하여 각 사람에게 할당된 생활 공간은 10제곱피트 미만이었다. 독일군은 지속적으로 게토의 규모를 줄여 유대인들을 여러 차례 강제 이주시켰다. 독일군은 1941년 10월 4일에 소게토를 파괴하고 제9요새(Devintas Fortas)에서 거의 전 주민을 학살했다. 같은 달 말, 1941년 10월 29일에 독일군은 "대작전(Great Action)"으로 알려진 작전을 진행했다. 그들은 제9요새에서 하루 만에 9,200명의 유대인을 총살했다.

카디쉬는 가능한 기회를 틈타 코브노 게토의 일상생활과 1944년 탈출 이후 게토의 마지막 날을 기록했다. 이것은 홀로코스트 시대 게토 생활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진 기록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코브노 게토에서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독일군은 이를 엄격히 금지했으며 어기는 자들은 모든 반항적인 행위와 마찬가지로 주저 없이 사형했다.

게토 밖에서 비밀리에 필름을 구하고 현상하는 일은 내부에서 몰래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만큼 위험했다. 카디쉬는 코브노시에서 독일 점령군을 위해 엑스레이 장비를 수리하는 기술자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도시에 도착한 그는 카메라 필름과 필요한 물품을 물물교환할 기회를 찾았다. 그는 엑스레이 필름을 현상할 때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화학물질을 사용하여 독일군 병원에서 네거티브 필름을 현상했으며 목발 세트 안에 숨겨 몰래 빼내는 데에 성공했다.

카디쉬 사진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그는 특히 게토의 일상생활을 포착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6월, 초기 포그롬의 잔혹함을 목격한 그는 학살된 유대인의 아파트 문에 피로 휘갈겨 쓴 이디시어 단어 "복수"(Nekoma)를 사진에 담았다.

그는 피사체를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들거나 필요할 때마다 외투의 단춧구멍에 몰래 넣어서 밀수한 음식을 찾는 과정에서 리투아니아와 독일 경비대로부터 굴욕과 고통을 당하는 유대인, 소지품을 썰매나 수레를 얹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유대인, 강제 노동 여단에 집단 수용된 유대인 같은 사진을 찍었다. 또한 카디쉬는 코브노의 유대인 의회(Ältestenrat)의 식량 정원과 학교, 고아원 및 작업장에서 새롭게 규제된 일상 활동도 기록했다. 그의 사진은 게토 생활의 가혹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 외에도 인물, 황량한 거리, 비공식적이고 즉흥적인 모임의 친밀함을 그려내는 내부자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게토 내부를 찍은 카디쉬의 마지막 사진 중에는 게토 수용자들이 에스토니아의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는 것을 기록한 사진이 있다. 1944년 7월, 그는 게토에서 탈출한 후 강을 건너 게토가 청산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독일군이 후퇴한 후, 그는 폐허가 된 게토와 은신처에서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은 소규모 집단들을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A pair of shoes left behind after a deportation action in the Kovno ghetto.

코브노 게토에서 추방된 후에 남겨진 신발 한 켤레. 사진작가 조지 카디쉬(George Kadish)는 사진에 "시신이 사라졌다"는 글을 달았다. 리투아니아 코브노. 1943년경.

Credits:
  •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courtesy of George Kadish/Zvi Kadushin

컬렉션 보관

카디쉬는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차렸다. 그는 게토 유대인 경찰의 고위 간부인 예후다 주포위츠(Yehuda Zupowitz)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네거티브 필름과 작품을 숨길 수 있었다. 주포위츠는 1944년 3월 27일의 "경찰 작전(Police Action)" 중에 제9요새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살해될 때까지 작품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았다. 카디쉬는 폐허가 된 게토로 돌아와서 네거티브 사진 컬렉션을 되찾았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후 카디쉬는 특별한 다큐멘터리 기록물을 가지고 리투아니아를 떠나 독일로 향했다. 미국 점령지인 독일에서 그는 난민 수용소에 거주하는 생존자들을 위한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뉴욕의 유대인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정식으로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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