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 survivors of Auschwitz. Standing next to the nurse are Miriam and Eva Mozes. Behind them (wearing white hats) are Judy and Lea Csenghery. Both sets of sisters are twins.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친위대 의사 요제프 멩겔레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치명적인 인체 실험을 자행했다. 수용소에서 실험한 나치 의사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멩겔레는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종종 아우슈비츠 입구에서 도착한 수감자 중에 실험 대상을 선정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중요 사실

  • 1

    멩겔레는 나치 인종 이론으로 유대인과 롬인("집시") 대한 광범위한 실험을 정당화했다.

  • 2

    아우슈비츠에서 실험당한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사망했다. 의도적으로 사망하게 만든 실험도 있었다.

  • 3

    멩겔레는 전후 남미로 탈출하여 범죄에 대한 판결을 기피했다. 그는 1979년에 브라질에서 사망했다.

서론

View of the kitchen barracks, the electrified fence, and the gate at the main camp of Auschwitz (Auschwitz I).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주방 막사, 고압전선 펜스, 그리고 정문(아우슈비츠 I). 정문에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사인이 걸려 있다. 이 사진은 소련군 부대의 해방 직후 찍은 것이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1945년.

Credits:
  • Instytut Pamieci Narodowej

요제프 멩겔레는 홀로코스트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명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경력과 그곳에서 수행한 생체 실험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해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전후 은신 나치 범죄의 가해자를 재판에 회부하지 못한 국제적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의 악명 때문에 멩겔레는 수많은 서적, 영화 TV 쇼의 주제가 되었다. 다수는 멩겔레의 범죄에 대한 실제 사실을 왜곡하고 그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묘사했다. 일부는 그를 과학적 근거 없이 가학적인 실험을 미친 과학자로 묘사한다.

멩겔레에 대한 진실은 충격적이다. 그는 고도로 훈련된 의사이자 의학 연구자였으며 훈장을 받은 참전용사였다. 자신의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독일의 주요 연구 기관 곳에서 근무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그가 진행한 대부분 의학 연구는 다른 독일 과학자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자행한 수십 명의 생체 의학 연구원 명이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살해할 희생자를 선별한 수많은 의료 전문가 명이었다

멩겔레는 나치 정권 아래에서 독일 과학의 규범을 지켰다. 그의 범죄는 과학이 특정 집단의 권리, 존엄성, 심지어 인간성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 위해 진행될 때 초래되는 극도의 위험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멩겔레  

요제프 멩겔레는 1911 3 16 독일 바이에른주 귄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농기구 제조업자인 카를 멩겔레의 장남이었다

멩겔레는 여러 대학에서 의학 신체 인류학을 공부했다. 1935 뮌헨 대학교에서 신체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6 멩겔레는 국가 의료 고시에 합격했다.  

1937 멩겔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전 생물학 인종 위생 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감독이었던 오트마워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의 조수였다. 페르슈어는 쌍둥이 연구로 유명한 선도적인 유전학자였다. 페르슈어의 지도에 따라 멩겔레는 1938년에 추가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나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다

멩겔레는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에는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1년에 그는 다른 우익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Deutschnationale Volkspartei) 준군사 조직인 슈탈헬름(Stahlhelm) 가입했다. 1933 멩겔레는 슈탈헬름을 흡수한 나치 돌격대(SA) 일원이 되었지만 1934년에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멩겔레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인종 과학의 생물학적 인종 차별이란 잘못된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는 독일인이 다른 인종과 생물학적으로 다르고 우월하다고 믿었다. 인종 과학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교리였다. 히틀러는 특정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질병이나 기형이 있는 사람의 강제 불임 수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 과학을 사용했다. 독일인과 유대인, 흑인 또는 롬인 간의 결혼을 금지한 뉘른베르크 인종법도 인종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1938 멩겔레는 나치당과 친위대(SS)에 가입했다. 과학자로 일하면서 독일 "인종" 우월성을 유지하고 증진하려는 나치의 목표를 뒷받침했다. 멩겔레의 고용주이자 스승인 페르슈어도 생물학적 인종차별을 수용했다. 페르슈어와 멩겔레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연구를 수행하는 외에 뉘른베르크법을 따라 사람이 독일인 혈통인지 결정하는 나치 당국에 전문가 의견을 제공했다. 또한 멩겔레와 그의 동료들은 법에 따라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거나 결혼이 금지될 있는 독일인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상태를 평가했다

동부 전선에서 복무 

1940 6 멩겔레는 독일군(Wehrmacht) 징집되었다. , 그는 무장 친위대(Waffen-SS) 의무근무로 자원했다. 처음에 그는 독일 점령지 폴란드 친위대의 인종 개척 본부(RuSHA)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멩겔레는 독일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인종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독일인인지 여부를 확인할 있도록 친위대에서 사용하는 기준과 방법을 평가했다

1940 말경 멩겔레는 친위대 비킹사단("Wiking") 공병 대대에 군의관 장교로 배치되었다. 1941 6월부터 18개월 동안 그는 동부 전선에서 극도로 잔혹한 전투를 목격했다. 또한, 소련 침공 처음 동안 멩겔레의 사단은 수천 명의 유대인 민간인을 학살했다. 멩겔레는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여 2 1 철십자 훈장을 받고 무장친위대 대위(SS-Hauptsturmführer) 승진했다

멩겔레는 1943 1월에 독일로 돌아갔다. 다음 친위대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스승 페르슈어 밑에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페르슈어는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인류학, 인간 유전학 우생학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 for Anthropology, Human Genetics, and Eugenics; KWI-A) 소장이 되었다

아우슈비츠로 배치

1943 5 30 친위대는 멩겔레를 아우슈비츠에 배치했다. 멩겔레 스스로 요청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수용소 의사로 근무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규모가 가장 컸으며 유럽 전역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절멸 수용소 역할도 감했다. 멩겔레는 다른 임무 외에 비르케나우의 "집시 캠프"(Ziegeunerlager) 담당했다. 1943년부터 21,000명의 롬인("집시") 남성, 여성 어린이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이곳에 수감되었다. 1944 8 2 가족 수용소가 폐쇄되었을 멩겔레는 비르케나우 가스실에서 살해할 2,893명의 롬인 수감자 선택하는 일에 참여했다. 이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또는 아우슈비츠II 수용소 구역의 의무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 11, 그는 비르케나우 병원으로 배치되었다.

"죽음의 천사": 살해할 수감자를 선택하다

수용소 업무의 일환으로 아우슈비츠의 의료진은 소위 선발 작업을 수행했다. 선발의 목적은 일할 없는 사람들을 식별하는 것이었다. 친위대는 이런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간주하고 살해했다. 유대인 수송차가 비르케나우에 도착하면 수용소 의료진은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 할 수 있을 건강한 성인을 선발했다.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노동력으로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은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아우슈비츠와 다른 수용소의 의사들도 수용소 의무실과 막사에서 정기적으로 선발 검사를 실시했다. 다치거나 너무 아파 약해서 일할 없는 수감자를 식별하기 위해 이러한 선발 작업을 수행했다. 친위대는 이러한 수감자들을 살해하기 위해 독물 주사와 독가스 같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멩겔레는 비르케나우에서 일상적으로 그러한 선발 작업을 수행했고, 일부 수감자들은 그를 "죽음의 천사"라고 불렀다. 비르케나우의 유대인 수감자였던 부인과 의사인 기셀라 페를(Gisella Perl)은 멩겔레가 여성 의무실에 나타난 것을 수감자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회상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러한 방문이 두려웠다[. . .] 우리는 우리가 살도록 허락될지 결코 알지 못했다[. . . .]  그는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할 있었다.

기셀라 페를의 회고록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의사였다》

2 세계대전 , 멩겔레는 밑에 일했던 수감자 의사와 인체 실험에 생존한 수감자들의 증언 덕분에 아우슈비츠에서 자행한 일들이 악명을 떨쳤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50명의 의사 명이었다. 수용소에서 최고 고위 의사나 다른 의사보다 더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아우슈비츠에서 복무한 모든 의사 중에서 가장 알려져 있다. 한 이유는 멩겔레가 열차 경사로에 서서 선별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멩겔레는 자신이 선별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때도 여전히 경사로에 나타나 수감자 사이에서 자신의 실험을 위한 쌍둥이를 찾고 비르케나우 의무실에서 사용할 의사를 찾았다. 결과적으로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선택을 받은 많은 생존자는 멩겔레가 그들을 선택한 의사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멩겔레는 그의 동료들만큼 자주 수행하지 않았다

A transport of Jews from Hungary arrives at Auschwitz-Birkenau.

헝가리에서 유태인을 싣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도착하는 수송 열차. 폴란드, 1944년 5월.

Credits:
  • Yad Vashem Photo Archives

아우슈비츠의 생체의학 연구원 

친위대는 독일 생체의학 연구원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비윤리적이고 상황에 따라 치명적인 인체 실험을 수행할 있도록 허가했다. 아우슈비츠는 다른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인체 실험에 수감자들을 제공했다. 또한, 다양한 인체 실험을 위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곳에 보내진 수감자들의 때문이었다. 친위대는 다양한 국가민족 배경을 갖춘 130 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를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특별한 기준에 맞춘 인간 실험체를 찾는 연구원들은 다른 수용소보다 아우슈비츠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 수감자 대상으로 실험을 수행한 12 이상의 친위대 의료진 명이었다. 중에는 다음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 아우슈비츠 수석 의사 에두아르트 비르츠(Eduard Wirths);
  • 불임 치료의 저명한 전문가 카를 클라우베르크(Carl Clauberg);
  •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에 수천 명의 장애 환자를 독가스로 살해한 호르스트 슈만(Horst Schumann);
  • 이게파르벤(I.G. Farben) 바이엘(Bayer) 자회사를 위해 다하우, 아우슈비츠 구센 강제 수용소 수감자에게 약물 실험을 자행한 친위대 의사 헬무트 베터(Helmut Vetter);
  • 해부학 교수 요한 파울 크레머(Johann Paul Kremer).

의사들은 아우슈비츠로 임명된 것을 각각 연구를 발전시킬 흥미로운 기회로 여겼다.

실험 유형

강제 수용소에서 자행된 실험은 많은 희생자들을 영구적으로 불구로 만들거나 죽게 했다. 일부 실험은 희생자를 의도적으로 사망하게 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실험을 수행한 의료진은 수감자의 허가를 구하지도 않았고, 치료나 일어날 수 있는 효과에 대해 알리지도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수행된 실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대량 불임 수술;
  • 수감자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질병에 감염시켜 효과를 연구하고 치료법 시험;
  • 연구나 의료진 훈련 목적을 위해 불필요한 수술 시술;
  • 인류학 의학 연구를 위해 수감자를 살해 해부;
  • 멩겔레의 아우슈비츠 실험.

아우슈비츠에서 정규 업무와는 별개로 멩겔레는 수감자를 연구하고 인체 실험을 했다. 그의 스승인 페르슈어가 KWI-A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멩겔레가 아우슈비츠로 배치되는 것을 마련했다는 추측도 있다. 아우슈비츠에 근무하는 동안 멩겔레는 독일 동료들에게 혈액, 신체 부위, 장기, 골격 태아를 보냈다. 모두 아우슈비츠 수감자에서 빼내 온 것이었다. 멩겔레는 수감자를 연구 실험체로 이용해 동료의 연구조사에 협력했다

KWI-A 협력 외에 멩겔레는 직접 아우슈비츠 수감자를 생체 실험했다. 그는 실험 결과를 출판하여 대학 교수직을 얻기 필요할 이력서를 키우기를 희망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하는 동안 멩겔레는 병영에 위치한 연구 단지를 조성했다. 연구 인원은 수감자 중에 의료 전문가를 선발했다. 멩겔레는 그의 연구를 위한 최신 기구와 장비를 구할 있었고 심지어 병리학 연구실도 세울 있었다

연구 목표

멩겔레의 연구와 KWI-A 위해 수행한 연구는 유전자가 어떻게 특정한 신체적, 정신적 특성으로 성장하는지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연구를 윤리적으로 수행하면 합법적이고 중요한 유전 연구 분야이다. 그러나 멩겔레, 페르슈어와 그들의 동료들이 진행한 연구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근간인 유사과학적인 인종 이론의 신념으로 뒤틀어졌다. 이론은 인류는 유전적으로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인종의 계층 구조를 확립하고 "열등한" 인종이 "우수한" 인종의 구성원보다 유전적으로 부정적인 특성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유전적 특성에는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결함이 나타날 것으로 추정했다. 이 간주에 방랑, 성매매, 범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거나 부도덕한 행위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인종에 대한 잘못된 이론을 따르면, 인종 간의 결혼은 "우수한" 인종에게 부정적인 특성을 물려주고 허약하게 만든다고 믿게 된다

멩겔레는 특정 인종의 구성원을 명확하게 식별할 있는 특정 신체적 생화학적 형질을 파악하려고 했다. 멩겔레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형질을 찾으면 독일 민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보존하는 노력에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멩겔레와 그의 동료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당시 아우슈비츠 수감자)에게 해롭고 치명적인 실험을 자행하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멩겔레의 희생자는 누구였는가?

멩겔레는 주로 롬인과 유대인 희생자를 선택했다. 집단들은 특히 나치 독일 생물 의학 연구자의 관심을 끌었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롬인과 유대인 둘 다 "인간 이하"적이며 독일 "인종" 위협이 되는 존재로 간주했다. 이러한 이유로 나치 과학자들은 이러한 집단의 구성원에게 의료 윤리를 적용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멩겔레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복무하는 동안 20,000 이상의 롬인이 수감되었고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수송차로 도착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과학자가 이러한 대규모 집단을 한곳에 모여 있거나, 그리고 아무런 방식으로 인체 실험할 있는 권위가 있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인체 실험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 자체가 범죄라고 동료에게 말하기도 했다.

롬인

멩겔레는 롬인을 의학 실험의 대상으로 선정한 외에도 "집시 캠프"에서 롬인 남성, 여성 어린이에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롬인 어린이들에게 입에 괴저가 감염하는 노마병(Noma) 발생하자 그는 수감자 의사에게 질병을 연구하도록 했다. 노마병은 주로 영양실조가 극심한 어린이에게 발병하는 세균성감염증이다. 그러나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롬인 어린이들이 수용소 내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유전적 이유로 노마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감자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치명적이었던 노마병을 치료법을 찾아냈다. 그런데도 완치된 아이들은 가스실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쌍둥이

1930년대에 쌍둥이는 인간 유전자 연구의 주요 관심사였다. 2 세계대전 전에 페르슈어와 다른 생의학 연구자들은 쌍둥이를 질병으로 간주하여 유전적 기초를 연구했었다. 초기의 연구자들은 쌍둥이나 그들의 부모의 허락을 얻었지만,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많은 쌍둥이를 모집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우슈비츠에서 멩겔레는 수송차로 도착한 유대인들과 수감된 롬인 중에서 수백 쌍의 쌍둥이를 모았다. 이전의 어떤 연구자는 이렇게 많은 쌍둥이를 연구하고 실험할 수는 없었다

멩겔레는 연구원들에게 쌍둥이 신체의 모든 사항을 측정하고 기록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쌍둥이에게서 다량의 혈액을 채취했고 때때로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시술을 했다

[...] 그들은 우리 전체에 주사도 놓았다. 주사 때문에 여동생이 병에 걸렸다. 심한 감염으로 목이 부어올랐다. 그들은 여동생을 병원으로 보냈고 원시적인 환경에서 마취 없이 그녀를 수술했다. (…)

로렌크 안드라스 메나스케(Lorenc Andreas Menasche 또는 Menasche Lorenzi/Lorenzy)의 진술에서, 수감자 번호 A 12090.

또한, 멩겔레는 사체 부검을 위해 쌍둥이 둘 다 동시에 살해했다. 멩겔레는 부검 일부 장기를 빼내어 KWI-A 보냈다.

선천이상이 있는 사람

멩겔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입구에 도착한 유대인을 선별하면서 신체적 이상이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이러한 사람은 왜소증 및 거인증 또는 내반족을 가진 사람이 포함되었다. 멩겔레는 이러한 사람들을 연구한 다음 살해했다. 그는 연구원들이 연구를 계속 진행할 있도록 시체를 독일로 보냈다.

또한 멩겔레는 양쪽 눈 색깔이 다른 홍채 이색증을 가진 롬인과 유대인을 찾았다. KWI-A 있는 멩겔레의 동료 명이 특히 이런 상태에 관심을 가졌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에서 홍채 이색증을 가진 사람들을 살해하고 동료에게 눈들을 보냈다

어린이

멩겔레의 의학 실험의 희생자는 대부분 어린이였다. 실험을 위해 선발된 멩겔레 어린이는 다른 수감자들과 분리된 병영에서 생활했고 약간 나은 음식과 치료를 받았다. 멩겔레는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멩겔레 실험의 생존자인 모세 오퍼(Moshe Ofer) 1985년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멩겔레] 좋은 삼촌처럼 우리를 찾아와서 초콜릿을 줬다. 메스나 주사기를 사용하기 전에 그는 '걱정하지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는 화학 물질을 주입하고 티비(Tibi) 척추를 수술했다. 실험이 끝난 후에 그는 우리에게 선물을 가져다주곤 했다...나중에 그는 우리 머리에 가시를 꽂았다. 아직도 구멍 자국이 남아 있다. 어느 그는 티비를 데려갔다. 동생을 며칠동안 못 봤다. 나중에 동생은 머리를 온통 붕대로 감은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품에서 죽었다.

멩겔레는 자신과 KWI-A 실험 지원하기 위해 어린이를 이용했다. 그는 동료가 제공한 물질을 어린이와 신생아의 눈에 넣어 색깔의 발달에 관한 연구에 협력했다. 결과는 눈 자극과 부종에서 실명,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멩겔레의 실험을 위해 선발된 유대인 쌍둥이를 돌보던 수감자는 나중에 아이들이 그들의 수술에 어떻게 감정적, 육체적으로 반응했는지 설명했다:

혈액 검사는 먼저 손가락에서 채취한 다음 동맥에서 채취했으며, 상황에 따라 똑같은 피해자에게 두세 번 채취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만지지 못하도록 몸을 가리려고 했다. 의료원들은 강제로 진행했다. …안약도 눈에 넣었다어떤 쌍둥이 쌍은 양쪽 눈에 안약을 넣었고, 다른 쌍은 한쪽 눈에만 넣었다. ...이러한 시술을 받은 피해자들은 고통에 있었다. 눈꺼풀이 심하게 부풀며, 작열감에 시달렸다….

정의를 기피하다

1945 1, 소련 붉은군대가 폴란드 서부를 통과해 진군하자 멩겔레는 수용소의 남은 친위대원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했다. 그는 다음 달간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에서 복무했다. 전쟁 말기에 그는 독일 군복을 입어 군부대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의 부대는 미군에 항복했다

독일군 장교로 변장한 멩겔레는 미군 전쟁 포로가 되었다. 미군은 1945 8 초에 멩겔레의 이름이 이미 전범 수배자 목록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그를 석방했다

1945 후반부터 1949 봄까지 멩겔레는 가명으로 바이에른의 로젠하임 근처에서 농장주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과 연락할 있었다. 미국 전범 수사관들은 멩겔레가 아우슈비츠에서 저지른 범죄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를 찾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멩겔레 가족의 거짓말을 믿은 수사관들은 멩겔레가 죽었다고 결론 내렸다. 미국이 그를 체포하려고 시도하자 멩겔레는 독일에서는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49 7 멩겔레는 가족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다른 가명으로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1956년까지 멩겔레는 아르헨티나에서 제대로 정착했고 너무 안전하다고 느껴 호세 멩겔레(José Mengele)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얻었다. 그러나 멩겔레는1959년에 서독 검찰이 그가 아르헨티나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멩겔레는 파라과이로 이민하여 그곳에서 시민권을 취득했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 요원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하여 이스라엘로 데려가 재판했다. 멩겔레는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도 찾고 있다고 정확하게 추측하고는 파라과이를 떠났다. 그는 독일에 있는 가족의 도움으로 브라질 상파울루 근처에서 가명으로 여생을 보냈다. 1979 2 7, 멩겔레는 브라질 베르티오가(Bertioga) 근처의 휴양지에서 수영하다가 뇌졸중으로 익사했다. 그는 "볼프강 게르하르트" (Wolfgang Gerhard)라는 가명으로 상파울루 교외에 묻혔다

멩겔레의 시신 발견 신원 확인

1985 5 독일, 이스라엘, 미국 정부는 멩겔레를 추적하고 그를 재판에 회부하기로 공동 합의했다. 독일 경찰은 독일 귄츠부르크(Günzburg) 있는 멩겔레 가족 친구의 집을 급습하여 멩겔레가 사망해 상파울루 근처에 묻혔다는 증거를 찾았다. 브라질 경찰은 1985 6 멩겔레의 무덤을 찾아 그의 시신을 발굴했다. 미국, 브라질 독일 법의학 전문가들은 유골이 요제프 멩겔레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1992년에 DNA 증거가 이러한 결론을 확인했다

끝내 멩겔레는 34 동안 피해 다니면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Footnotes

  1. Footnote reference1.

    Gisella Perl, I was a Doctor in Auschwitz (New York: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48), 120.

  2. Footnote reference2.

    수감자 번호 A 12090, 로렌크 메나스케(Menashe Lorenzy)는10살 때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그는 쌍둥이 자매와 함께 맹겔레의 의학 실험의 피해자였다. Archives of the State Museum Auschwitz-Birkenau, Statements Collection, vol. 125, pp. 146–147. Cited according to Voices of Memory: Medical Experiments (Oświęcim: Auschwitz-Birkenau State Museum in Oświęcim, 2016), p. 58 (e-book).

  3. Footnote reference3.

    Anatomy of the Auschwitz Death Camp, ed. Yisrael Gutman and Michael Berenbaum 따라 인용.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4, p. 324-325.

  4. Footnote reference4.

    Elżbieta Piekut-Warszawska, “Dzieci w obozie oświęcimskim (wspomnienia pielęgniarki),” [Children in the Auschwitz camp (recollections of a nurse)] in Przegląd Lekarski, vol. 1 (1967), pp. 204–205의 발췌문. Voices of Memory: Medical Experiments (Oświęcim: Auschwitz-Birkenau State Museum in Oświęcim, 2016)에 따라 인용.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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