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하우(Dachau) 강제 수용소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나치 독일과 동맹국은 44,000개 이상의 수용소와 게토 같은 다른 수감 시설들을 설립했다. 가해자들은 강제 노역, "국가의 적"으로 간주한 사람들의 구금 및 대량 학살을 포함한 위한 다양한 목적으로 이러한 시설을 이용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거나 살해되었다. 이러한 시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운영한 강제 수용소가 다하우이었다.
중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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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에 설립된 다하우는 나치 정부의 최초의 정식 강제 수용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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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우는 뒤이을 모든 강제 수용소가 따를 본보기가 되었으며 친위대 강제 수용소 경비원의 훈련소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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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다하우의 수감자의 수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학자들은 적어도 4만 명의 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 설립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1933년 3월에 설립되었다. 국가사회당(나치) 정부가 세운 최초 정식 강제 수용소였다. 당시 뮌헨 경찰청장이던 하인리히 힘러는 이 수용소를 "정치범을 위한 최초의 강제 수용소"라고 발표했다.
이 수용소는 독일 남부 뮌헨에서 북서쪽으로 약 10마일 떨어진 다하우 마을의 북동부 근처에 폐군수품공장 부지에 세워졌다. 1933년 3월 22일, 첫 수감자들이 수송차로 수용소에 도착했다.

초기 수감자
첫 해에는 5,000명의 수감자만 수용할 수 있었다. 초기 수감자들은 주로 독일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노동조합원 같은 나치 정권의 정적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호와의 증인, 롬인(집시), 동성애자, "반사회적분자" 및 상습 범죄자와 같은 집단도 다하우에 억류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교적 소수 유대인이 수감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위의 집단에 속했거나 1935년 뉘른베르크 법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아 복역하는 사람들이었다.
다하우 수용소 확장
1933년 10월, 다하우의 소장인 테오도어 아이케(Theodor Eicke)는 수감자가 사소한 위반만 해도 잔혹한 처벌을 가하는 제도 규정을 도입했다. 후에 아이케가 새로 설립된 독일 강제 수용소 체계의 감독관이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강제 수용소의 체제가 다하우 수용소를 본보기로 규정했다. 또한, 다하우는 강제 수용소 시스템에 배치될 친위대 경비원을 위한 훈련소 역할도 맡았다.
1937년 초에 친위대는 수감자를 동원하여 원래 수용소 대지에 대형 복합 건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옛 군수품 공장을 철거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공사는 1938년 8월 중순에 공식적으로 완성되었고 이후 수용소는 1945년까지 크게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따라서 다하우는 제3제국의 전 기간 운영되었다.
다하우 수용소는 친위대 강제 수용소 경비원의 훈련소였다. 이 수용소의 조직과 일상 규칙은 모든 나치 강제 수용소가 따랐다.
다하우 수용소의 유대인 수감자
다하우의 유대인 수감자들은 유대인 박해가 악화하면서 증가했다. 1938년 11월 10~11일, 수정의 밤(Kristallnacht)의 결과로 거의 11,000명의 유대인 남성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대부분 몇 주에서 몇 달 동안 수감된 후에 석방되었지만, 많은 이들은 독일을 떠날 준비를 했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풀려날 수 있었다. 독일계 유대인들이 독일 점령지 동부의 게토와 절멸 수용소로 이송되자 다하우의 유대인 수감자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동부 수용소에서 수천 명의 수감자들이 죽음의 행진으로 독일 영토로 오게 되면서 유대인들이 다시 수감되기 시작했다.
다하우 집단 수용소 구역
다하우는 수용소와 화장터로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수용소 구역은 32개의 막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나치 정권을 반대한 성직자들이 수감된 막사와 생체 실험용으로 지정된 막사도 있었다.
수용소 관리실은 정문 옆에 있었다. 또한 수용소에는 주방, 세탁실, 샤워실, 작업장뿐만 아니라 감옥(벙커라고 불음)도 포함된 보조 건물 시설도 있었다. 감옥과 주방 사이에 있던 마당은 수감자들을 즉결 처형할 시 사용되었다. 수용소는 전기 철조망 울타리, 배수로와 7개의 감시탑이 있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42년에는 수용소 구역 옆에 화장터가 건설되었다. 이곳에 이미 있던 화장터와 가스실을 갖춘 새로운 화장터(막사 10호; Barrack X)가 있었다. 하지만 막사 10호의 가스실이 학살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대신 수감자들은 "선택"을 당했다. 병이 심하거나 약해서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린츠(Linz) 근처에 있던 하르트하임(Hartheim) "안락사" 살해 시설로 보내졌다. 2,500여 명의 다하우 수감자들이 하르트하임의 가스실에서 학살되었다. 또한, 처음에는 벙커 옆에 있는 마당에서, 후에는 특별히 설계한 친위대 사격장에서 대량 총살을 자행했다. 1941년 소련 침공 이후 최소 4,000명의 소련군 전쟁 포로를 포함하여 수천 명이 다하우에서 학살되었다.
생체 실험
1942년부터 독일 의사들은 다하우 수감자를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시작했다. 독일 공군과 항공 실험 연구소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고고도 및 저체온증 실험과 바닷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러한 실험은 폭격 출격하거나 언 바다에 추락한 독일 조종사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독일 과학자들은 말라리아와 결핵과 같은 질병을 치료할 약의 효능도 실험했다. 이 실험의 과정에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죽거나 장애를 입었다.
강제 노역

다하우 수감자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수용소 운영, 건설 프로젝트, 수용소 내에 설립된 소규모 수공예 산업에 일했다. 또한 수감자들은 도로 건설, 자갈 채굴장에서 일했으며, 습지의 물을 배수했다.
전시에는 강제 수용소 수감자의 강제 노역은 독일 무기 생산에 점점 더 중요해졌다.
1944년 여름과 가을에 전쟁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독일 남부의 군수 공장 근처에 다하우 관리 아래 있는 위성 수용소들이 세워졌다. 다하우는 약 140개의 보조 수용소가 있었는데, 수감자들은 대부분 남부 바이에른에서 무기 생산 작업만 진행했다. 이 중 수천 명이 일을 하다가 죽었다.
해방
연합군이 독일로 진군하자 독일 당국은 전선에 가까이 있던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이송하기 시작했다. 동부에서 수감자를 실은 수송차가 다하우로 끊임없이 도착하면서 수용소 내의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하였다.
물과 음식을 거의 또는 전혀 못 먹은 상태에서 며칠 동안 이송한 수감자들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착했으며 사경을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과밀, 열악한 위생 상태, 식량 부족과 수감자의 허약한 상태로 인해 발진티푸스 전염병이 퍼지면서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45년 4월 26일 미군이 인근에 접근했을 때 다하우와 보조 수용소에는 67,665여 명의 수감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숫자의 절반 이상이 주 수용소 구역에 있었다. 이 중 43,350명은 정치범으로 분류되었고 22,100명은 유대인이었으며 나머지는 다양한 범주에 속했다. 연합군이 진군하자 다하우 수용소에서 최소 25,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남쪽으로 강제 행진하거나 화물 열차로 멀리 이송되었다. 소위 죽음의 행진으로 부르는 과정에 독일군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총살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저체온증 또는 탈진으로도 사망했다.
1945년 4월 29일, 미군이 다하우를 해방했다. 미군이 다하우 수용소에 접근했을 때 다하우에 도착한 30대 이상의 열차 차량을 발견했는데 상당히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군은 5월 초에 죽음의 행진에 끌려간 수감자들을 해방했다.
수감자 수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다하우의 수감자들은 약 20만 명을 넘어섰다. 다하우에서 사망한 수감자의 수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처형하기 위해 수용소로 끌려온 수천 명의 사람들은 기록되지 않은 상태로 살해되었다. 또한, 대피 중에 사망한 수도 집계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적어도 4만 명의 수감자들이 다하우에서 사망했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