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 publication on multiracial children in the Rhineland

나치 독일의 흑인 박해

1933년 나치가 집권 당시 독일에는 수천 명의 흑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나치 정권은 흑인을 인종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여겼기에 이들을 괴롭히고 박해했다. 흑인을 학살 대상으로 삼는 중앙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은 없었지만, 나치는 많은 흑인을 투옥하고, 강제 불임 수술하고, 살해했다.

중요 사실

  • 1

    나치는 독일에서 흑인을 괴롭히고 차별했다. 나치 정권의 인종법은 이들의 사회적, 경제적 기회를 제한했다.

  • 2

    나치 정권은 최소 385명의 다인종 라인란트 어린이(경멸적으로 "라인란트 사생아"라고 불림)를 포함한 알려지지 않은 수의 흑인 및 다인종 사람들을 강제로 불임 수술했다.

  • 3

    전 독일의 흑인을 대상으로 한 대량 체포는 없었다. 그런데도 많은 흑인은 결국 노역장, 교도소, 병원, 정신과 시설 및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서론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 당시 독일에는 수천 명의 흑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나치 정권은 흑인을 인종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차별했다. 나치 시대(1933~1945)에 나치는 인종법과 정책을 통해 독일 흑인의 경제적, 사회적 기회를 제한했다. 또한 알려지지 않은 수의 흑인들을 괴롭히고, 투옥하고, 불임 수술을 하고, 살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흑인 공동체의 기원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수천 명의 흑인이 아프리카, 북미 및 남미, 카리브해 지역에서 독일로 이주했다. 이 체류자들은 거의 모두 남성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 특히 카메룬 출신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독일인은 식민지 주민에 대해 엄격한 이주 제한 조치를 했다. 독일 당국은 독일 내 흑인 영주권자 수를 제한하고 상당한 흑인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려고 했다. 

이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와 타국의 흑인 남성들은 사업을 배우거나 다른 일에 종사하기 위해 독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습생과 학생으로서 교육 기회를 찾았다. 또한 하인이나 선원으로 일하러 왔다. 상당수는 인간 동물원이라고 알려진 착취적인 전시회에서 공연자로 독일에 왔었다.

대다수 흑인 방문자는 단기간 독일에 체류할 계획이었다. 독일로 이주한 대부분의 흑인 남성과 여성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전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거주하기로 한 사람들은 소수였다. 또한 독일에 머물 계획이 없었던 일부 흑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독일에 갇히게 되었다.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 내외의 여행과 이주가 제한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대부분 독일의 예전 식민지 주민은 쉽게 출생지로 돌아가거나 해외로 이주할 수 없었다. 전후 평화 정착 과정에서 독일이 식민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후 질서에서 독일의 예전 식민지 국민은 독일 시민권도 없었고 여권이나 여행 서류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예전 식민지와 더 이상 공식적인 관계가 없는 독일(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에 발이 묶였다. 

바이마르 시대(1918~1933) 독일의 흑인 거주자

Slide shown during lectures at the State Academy for Race and Health in Dresden

1936년, 뮌헨. 백인 독일 여성과 흑인 프랑스 군인 사이에 태어난 딸이 백인 급우들과 서 있는 모습. 이 사진은 독일 드레스덴의 국립 인종보건학교(Staatsakademie für Rassen- und Gesundheitspflege)에서 유전학, 민족학 및 인종 간의 출산에 관한 강의에 사용되었다.

Credits:
  • Library of Congress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로 이주한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 흑인 소공동체의 본거지였다. 이 일부 남자는 1920년대 초기에 현지 독일 여자와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었다. 많은 독일계 흑인 가족은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하노버, 비스바덴 같은 대도시에서 서로 가까이 모여 살았다. 

바이마르 독일 사회에서 소외

독일 바이마르에서 인종차별은 흑인들의 일상생활이었다. 이 때문에 취업이 어려웠고, 대공황으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흑인 남성과 결혼한 독일 백인 여성은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고,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다. 흑인은 때때로 대가족 내에서 소외되기도 했다. 한 사례를 들면, 1925년 베를린에서 카메룬 흑인 아버지와 독일인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르 원야 미하엘(Theodor Wonja Michael)은 자신의 아버지가 외가에서 "금기의 주제"이었다는 현실을 기억했다. 

시민권이 없는 독일계 흑인 가족에게는 큰 문제였다. 당시 독일 시민권의 복잡성으로 인해 흑인 남성의 다수는 독일 시민이 아니었다. 이는 남편과 아버지의 시민권에 의존하는 아내와 자녀에게 영향을 끼쳤다. 시민권이 없으면 흑인 남성, 백인 아내와 자녀는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및 정치적 생활에 완전히 참여할 수 없다. 

흑인 공연자와 바이마르 문화

독일의 흑인 공동체는 규모가 작고 소외되어 있었지만, 알려지지 않은 존재는 아니었다. 1920년대 독일의 흑인은 바이마르 시대의 활기차고 혁신적인 문화생활의 일부로 특히 주목을 받았다. 독일인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과 공연에 매료되면서 실제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독일의 흑인들에게 무대에 설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그들은 극장, 서커스, 영화, 나이트클럽 및 카바레와 같은 생음악 공연장에서 공연했다. 

"라인란트 사생아": 라인란트의 다민족 어린이 

바이마르 시대에 독일 서부 지역인 라인란트(Rhineland)에서 태어난 600~800명의 다민족 어린이가 있었다. 독일 언론은 그들을 "라인란트 사생아"("Rheinlandbastarde")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언급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백인 독일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라인란트 점령기(1918~1930)의 대규모 연합군에 참가했던 프랑스 식민지 출신 군인이었다. 이들 군인 중 다수는 북아프리카인 또는 아시아인이었지만 대중 담론에서는 모두 흑인으로 불렸다. 

이 아이들은 다인종 혈통으로 인해 바이마르 독일 사회에서 양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아버지와 신체적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완전한 외국인도 아니었다. 대부분은 미혼모로부터 받은 독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이웃, 급우, 심지어 가족에게도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생모나 가족과 함께 살기도 했지만, 일부는 보육원에 버려지거나 입양되기도 했다. 

나치 정권(1933~1945) 당시 흑인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에서 집권하면서 인종에 대한 차별적이고 잘못된 생각을 법으로 제정하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나치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독일을 만들고 싶었고, 독일인을 우월한 "아리아인" 인종의 일원으로 여겼다. 그들은 유대인, 롬인 및 흑인을 "비아리아인"이자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하여 표적으로 삼았다. 나치는 비아리아인 독일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주로 유대인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흑인과 롬인에게도 적용되었다. 

나치 시대는 독일계 흑인의 박해, 소외 및 고립이 악화하는 시기였다. 바이마르 시대에 인종차별을 겪었지만, 나치 정권의 제도화된 인종차별은 흑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더욱 힘들고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 결과 독일의 흑인들은 나치의 집권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여겼다. 

나치는 인종뿐만 아니라 정치 같은 다른 이유로 독일계 흑인을 박해했다.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힐라리우스 "라리" 길게스(Hilarius "Lari" Gilges; 1909년생)는 독일 뒤셀도르프 출신의 독일계 흑인 무용수이자 공산주의 운동가였다. 1933년 6월 20일 나치는 그를 살해하고 시신을 거리에 버려두었다. 길게스의 살해는 나치 정권이 첫 몇 달 동안 독일 공산주의 운동을 괴멸하려는 기간에 일어났다.

나치의 인종 이데올로기는 독일 생활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었다. 많은 독일인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흑인을 공개적으로 차별했다. 그 결과 흑인들이 일자리를 찾고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동료들과 상사들은 나치 인종 공동체에서 피부색이 이방인으로 나타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꺼렸다. 해고, 퇴거 및 빈곤이 흔하게 발생했다. 일부 흑인들은 나치 독일에서의 생활을 낯선 사람들이 그들에게 침을 뱉고 인종적 비방을 해도 처벌받지 않던 시절로 기억한다.

전문직 공무원 반환법(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Berufsbeamtentums)

나치 정권이 공식적으로 흑인들을 독일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1933년 4월, 전문직 공무원 반환법에 따라 독일 공무원에서 "비아리아계" 사람들이 배제되었다. 이 법령은 "비아리아계"를 정확히 정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호했다. 유대인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했지만, 후속 법령에서는 흑인과 롬인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실제로는 시민만이 공무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법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흑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리고 독일 시민이었던 대부분의 흑인은 너무 어려서 공무원직에 취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법령과 이후에 인종 제한으로 인해 향후 취업 기회와 진로가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또한 나치는 흑인을 민족공동사회(Volksgemeinschaft)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뉘른베르크 인종법 

1935년 9월, 나치 정권은 인종에 관한 나치의 사상을 법으로 규정한 뉘른베르크 인종법(Nürnberger Rassengesetze)을 발표했다. 이 법은 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1935년 11월부터 뉘른베르크법은 롬인과 흑인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이들은 정권이 "집시, 흑인과 그의 사생아"(“Zigeuner, Neger und ihre Bastarde”)이라고 경멸적으로 비하했다.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두 법률이 있었다. 첫 번째인 국가시민법(Reichsbürgergesetz)은 독일 시민을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인 사람으로 정의했다. 정권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즉, 유대인, 롬인, 흑인)을 독일에서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두 번째는 독일인 혈통 명예 보호법(Gesetz zum Schutze des deutschen Blutes und der deutschen Ehre)이었다. 이 법은 인종 혼합 또는 소위 "인종 모독"(Rassenschande)을 금지했다. 이 법은 유대인과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 사이의 결혼과 성관계를 금지했다. 이 법에 대한 추가 조항은 독일의 흑인이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했다. 목표는 흑인이 독일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의 인종 간 커플에 대한 박해와 차별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독일의 흑인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미래를 건설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이 법은 특히 임신 및 결혼 연령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흑인들이 서로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이었지만 흑인 공동체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이러한 커플은 드물었다. 

뉘른베르크법에도 불구하고 일부 흑인과 독일 "아리아인"은 여전히 서로 연애를 했다. 이러한 관계는 두 파트너 양쪽에게 위험했으며 특히 법적인 결혼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나치 독일에서는 모든 사람이 결혼 허가를 신청해야 했다. 인종 간 커플이 지원할 때는 인종적 이유로 신청이 계속 거절되었다. 이렇게 신청할 때는 인종 간 관계가 정부 당국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커플에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신청으로 인해 괴롭힘, 불임 수술 및 파탄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뉘른베르크법 이전에 결혼한 법적 부부는 나치 정권의 괴롭힘을 당했다. 나치 정권은 백인 독일 여성들에게 흑인 남편과 이혼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인종 간 부부와 그 자녀는 공개석상에서 망신을 당하고 심지어 폭행까지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가지 사례로, 프랑크푸르트의 나치 언론인들은 지역 당보에 카메룬 출신인 듀얼라 미시포(Dualla Misipo)와 그의 독일계 흑인 가족을 지속적으로 조롱하고 비하했다. 그나 그의 독일인 백인 아내도 직업을 얻을 수 없었다. 

흑인 남성이 독일 백인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일부 처벌을 받은 사례가 최소 2건 이상 있었다. 

학교에서 흑인 어린이 배제

부모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많은 흑인 어린이도 나치 시대에서 심해진 외로움, 고립, 배제를 경험했다. 일부 흑인 어린이들은 자신이 독일인임을 느꼈고 기쁨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치의 인종 이데올로기에는 독일계 흑인 어린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라이베리아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스 마사쿼이(Hans Massaquoi)는 학급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등장하는 행진에 갔을 때를 기억했다. 

[히틀러]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그곳에 나는 순수한 애국심으로 가득 찬 파란 눈의 금발 아이들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에 가득 찬 곱슬머리의 갈색 피부를 가진 8살 소년이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을 나와 같은 "열등한 비아리아인"을 파괴하는 데 바친 그 사람을 내 주변의 모든 사람과 함께 응원하고 있었죠.

한스 J. 마사쿼이(Hans J. Massaquoi), 《운명의 목격자: 나치 독일에 흑인으로 자란 나》

나치 독일의 흑인 어린이들에게 학교는 굴욕의 장소가 되었다. 흑인 어린이들은 인종 과학 수업에서 굴욕을 당하고 나치를 지지하는 교사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A German teacher singles out a child with "Aryan" features for special praise in class.

독일 교사가 수업 시간에 "아리아인" 특징을 가진 어린이를 선발해서 특히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로 학생 간에 인종적 관점으로 서로를 판단하도록 가르쳤다. 전시, 독일.

Credits:
  • DIZ Muenchen GMBH, Sueddeutscher Verlag Bilderdienst

교육 체계의 나치화는 유대인 어린이들이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는 권리를 크게 제한한 것처럼, 1930년대 흑인 어린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흑인 학생들은 퇴학을 당해 교육을 마치지 못했다. 흑인 학생을 받아들이는 사립 학교는 거의 없었다. 독일에서는 취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수습생이 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학교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처음에 임시방편적이고 지역적인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치가 학교 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공식적인 금지법을 도입했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이후 나치 정권은 모든 유대인 어린이가 독일 공립학교에 다니는 것을 완전히 금지했다. 1941년 3월 나치 정권은 공식적으로 흑인과 롬인 어린이들도 공립학교에서 배제했다. 

나치 독일의 흑인 강제 불임 수술

나치는 독일의 흑인들, 특히 라인란트의 다인종 어린이들을 박해하기 위해 강제 불임 수술을 사용했다. 

불임 수술은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만드는 시술이다. 오늘날 강제 불임 수술은 국제법에 따라 전쟁범죄나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될 수 있다. 나치는 장애인, 롬인 및 흑인을 포함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로 불임 수술했다. 나치 지도자들은 이 사람들이 아리아 인종의 건강, 위력, 그리고 순수성을 위협한다고 믿었다.

"인종 혼합"으로 간주하는 것을 막는 방법을 모색하던 나치 정권은 수백 명의 흑인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했다. 따라서 나치 정권은 인종 간 결혼을 방지하기 위해 뉘른베르크법을 통과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미래 세대의 흑인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제 불임 수술을 했다. 

나치 독일의 일부 흑인들은 1933년 유전병 자손 예방법(Gesetz zur Verhütung erbkranken Nachwuchses; 유전건강법)에 따라 법원 명령하에 불임 수술을 받았다. 이 법은 "선천성 정신박약"("Minderwertig")라는 정의되지 않은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특정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강제 불임 수술을 의무화했다. 이 법에 따라 불임 수술을 받은 약 400,000명의 독일인 중에는 소수의 흑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 가지 사례로, 영국계 흑인 아버지와 독일계 백인 어머니를 둔 페르디난드 앨런(Ferdinand Allen)은 법에 명시된 질병 중 하나인 간질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1935년 법원 명령에 따라 불임 수술을 받았다. 1941년 5월 15일, 나치는 T4 프로그램(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나치의 대량 학살 프로그램)에 따라 베른부르크(Bernburg)에서 앨런을 살해했다. 

또한 나치는 단지 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독일의 일부 흑인들에 대한 불임 수술을 했다. 1930년대에 비밀 게슈타포 프로그램은 라인란트 지역의 다인종 어린이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관리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의사들은 1937년 말까지 최소 385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했다. 청소년의 불임 수술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수술에 동의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은 종종 법적 근거 없이 독일의 흑인들에 대해 강제로 불임 수술을 했다. 이러한 불임 수술은 특히 독일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나치가 판단하기에 사춘기에 접어들었거나 이미 성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흑인 및 다인종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나치 치하의 생활에 적응: 생계 소득원의 역할

1933년 나치가 집권했을 때 독일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흑인은 나치 정권 내내 사실상 독일에 갇혀 있었다. 일부는 나치 독일을 떠나려고 시도했지만, 대다수의 경우 이는 불가능했다. 독일에 있던 대부분의 흑인은 시민권 문제로 인해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없거나 합법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민할 수 없었다. 독일의 흑인들은 나치 치하의 삶에 적응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흑인들에게 내려진 경제적, 사회적 제약은 생활을 매우 힘들고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중 하나는 공연자로, 그리고 연예계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나치 치하에서는 불안정한 수입원이었다. 독일 문화생활의 나치화로 인해 공연자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흑인 남성과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크게 제한되었다. 

고용 기회가 줄어들자, 토고 출신의 크와시 브루스(Kwassi Bruce)는 1934년 독일 아프리카 쇼(German Africa Show)를 공동으로 만들었다. 독일 아프리카 쇼(German Africa Show)는 민속지학과 오락이 어우러진 순회 쇼였다. 이 쇼는 많은 흑인 공연자에게 수입을 제공했다.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잃어버린 아프리카 식민지를 되찾기 위한 명분을 홍보하기 위해 이 쇼를 이용했다. 나치 정권은 1940년에 이 쇼를 중단했다. 

1941년 나치 정권은 흑인 공연자들이 대중 앞에 서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금지 조치에 대한 특별한 예외는 영화 산업에 적용되었다. 흑인 남성, 여성, 어린이는 나치 세계관을 홍보할 목적으로 선전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특히 흑인(흑인 전쟁 포로 포함)은 식민주의를 옹호하고 잔혹성을 정당화한 독일 식민 행정관의 전기 영화 《칼 피터스》(Carl Peters; 1941)에 출현했다.

강제 수용소 및 기타 장소에 흑인 수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흑인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더욱 극단적으로 되었다. 이는 인종적, 정치적 적들로 추정되는 것에 대해 나치 정책의 광범위한 급진화의 맥락에서 발생했다. 독일에서 차별과 인종주의를 강화한 법과 정책으로 인해 많은 흑인이 노역장, 교도소, 병원, 정신과 시설 및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흑인의 다양한 경험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는 작센하우젠에서 수용되어 살해된 마줍 빈 아담 모하메드(Mahjub bin Adam Mohamed; 또는 바유메 모하메드 후센(Bayume Mohamed Husen)), 부헨발트에 수용된 게르트 슈람(Gert Schramm), 라벤스브루크에 수용되고 살해된 마사 은둠베(Martha Ndumbe), 그리고 라벤스브루크에 수용된 에리카 은간도(Erika Ngando)가 있다. 후센과 은둠베를 포함하여 그들 중 일부는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살아남아 자신의 경험에 대한 회고록과 증언을 남겼다. 지난 몇 년 동안 독일에서는 나치의 박해와 살해로 희생된 흑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걸림돌"(Stolpersteine) 기념물이 많이 세워졌다. 

학자들은 나치의 박해를 당한 흑인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연구하고 밝혀내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치 치하의 흑인들이 겪은 경험뿐만 아니라 개인과 전체 공동체에 미친 나치 이데올로기의 광범위한 영향과 비극적 결과를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Footnotes

  1. Footnote reference1.

    1884/5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은 아프리카의 토고(오늘날 토고 및 가나의 일부), 카메룬(카메룬 및 가봉의 일부, 콩고 공화국,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나이지리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독일령 동아프리카(탄자니아, 부룬디, 모잠비크의 일부,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잔지바르)에서 4개의 식민지를 지배했다.

  2. Footnote reference2.

    인간 동물원은 비유럽인을 전시하여 백인 관객들에게 비유럽인의 전통과 관습을 보여주려고 한 착취적인 전시회였다. 인간 동물원은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와 기타 "이국적인" 장소의 삶이 어땠는지 보여주기보다는 아프리카인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왜곡되고, 부정확하고, 편견적이고, 인종차별적이고, 조작된 묘사를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인간 동물원은 사람들과 고정관념을 악용하여 이익을 얻는 큰 사업이었다.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에서 인기 있는 오락 형태였다.

  3. Footnote reference3.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 식민지 출신의 아프리카인들은 시민이 아닌 식민지 신민으로 간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독일이 전후 평화 정착 과정에서 식민지를 잃게 되면서 이들 과거 식민지 국민은 사실상 무국적자가 되었다.

  4. Footnote reference4.

    미혼 여성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면 독일 시민권법에 따라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시민권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라인란트에 사는 다민족 어린이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그럴 때 해당했다.

  5. Footnote reference5.

    한스 J. 마사쿼이(Hans J. Massaquoi), Destined to Witness: Growing up Black in Nazi Germany (New York: W. Morrow, 199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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