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헨리(Henry)는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J.D.)를 받았다. 벌티모어 히브리인 연합회 랍비의 도움으로 헨리는 같은 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45년, 전략 연구소(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는 그에게 독일 뉘렌베르그에서 열리는 국제 전쟁 재판에 사용될 문서를 사전에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여러 명의 증인과 피고인들을 심문하였다. 전쟁 후, 그는 다양한 외교직을 수행하였다.
우리가 그들에게 “죽음의 방앗간"라는 음, 수용소 생활과 음, 바르샤바 게토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을 때였습니다. 음, 우리는 법정의 불을 어둡게 하고 음, 22명의 음, 피고인들의 얼굴을 비추는 조명만을 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폭력적인 영화들이 상영되는 동안 저는 그들의 얼굴을 살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 그들이 어떻게 분열되는지 정말 놀라웠습니다. [헤르만] 괴링은 절대로 그걸 보지 않았습니다. [루돌프] 헤스도 마찬가지였지요. [히샬마] 슈허트는…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이 모든 것들은 나와는 상관 없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영화 동안에도 그는 스크린에서 등을 돌리고 팔짱을 끼고 자신은, 자신은, 음, 나치 통치는 자신과 관계 없다는 표현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스] 프랑크, “폴란드의 도살자”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프린츠] 샤우켈, 그, 음, 강제 노동의 황제였던 사람도 눈물을 흘렸습니다…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스크린을 바라본 유일한 사람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였습니다. 그는 소위 바바리아, 음 프랑코니아의 가울라이터[나치 지역 지도자]로 불리우던 자였죠. 음, 그 더러운 잡지 “슈트라이머”[돌격대]의 편집장이자 발행인이었는데, 음, “스토름트루퍼”라고도 하지요. 그는…그는 아주 자기 독무대였습니다. 그 영화의 영상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기라도 하는 듯이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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