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kar Schindler standing (second from right) with some of the people he rescued.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오스카 쉰들러는 홀로코스트 기간에 유대인을 구출한 가장 유명한 구조자 중 한 명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쉰들러는 크라쿠프(Kraków) 게토의 유대인 강제 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을 운영했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잔혹함과 폭력을 목격한 쉰들러는 가능한 많은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중요 사실

  • 1

    오스카 쉰들러는 기회주의자, 독일 간첩이자 나치당원이었다. 그는 1939년 독일 점령지 크라쿠프에 와서 부자가 되려고 했다.

  • 2

    쉰들러는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

  • 3

    오스카상을 수상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는 오스카 쉰들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유대인의 반응은 다양했고 여러 요인에 따라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려움, 이기심, 탐욕, 반유대주의, 정치적 또는 이념에 따라 유대인을 돕기를 꺼렸다. 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신념 이유로 돕기로 선택한 사람도 있고 개인적 관계 때문에 돕는 사람도 있었다. 이 글은 유대인 구출을 도운 나치 당원 오스카 쉰들러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론

오스카 쉰들러(1908–1974)는 홀로코스트 당시 가장 유명한 유대인 구조자 중 한 명이다. 그는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많은 면에서 쉰들러는 구조자가 될 것이라고 볼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홀로코스트 당시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유대인을 돕기로 선택했다. 많은 구조자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도덕적 혹은 윤리적 원칙을 언급했다. 하지만 오스카 쉰들러는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의 전기를 살펴보면 어디에도 도덕적으로 청렴한 사람이라는 언급이 없다. 그는 탐욕스러운 기회주의자이며, 독일 간첩이었고, 나치당의 일원이었다. 그는 수많은 혼외 관계를 맺었다. 반복적으로 재정을 잘못 관리하여 대출금을 갚지 못했다. 쉰들러는 독일 점령지 폴란드 크라쿠프에 31세에 와서 부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크라쿠프에서 몇 년 동안 쉰들러는 서서히 변했다. 결국 그는 새로 얻은 부와 영향력을 유대인을 돕기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쉰들러의 본질과 행동의 차이점에 많은 사람들이 쉰들러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오스카 쉰들러: 배경

오스카 쉰들러(1908~1974)는 1908년 4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츠비타우(Zwittau; 현재 체코의 스비타비, Svitavy)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 쉰들러는 새로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다. 쉰들러는 독일계 사람이었다. 즉, 쉰들러는 독일어로 말하고 본인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1928년 쉰들러는 에밀리 펠츨(Emilie Pelzl)과 결혼했다. 그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다른 체코슬로바키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쉰들러도 짧게 군대에 복무했다.

나치당의 쉰들러

쉰들러가 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살지는 않았지만, 나치 운동에 참여한 시기는 193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 주민들 사이에서 나치에 대한 지지도가 증가하고 있었다. 1935년 쉰들러는 콘라트 헨라인(Konrad Henlein)의 주데텐 독일인당(Sudetendeutsche Partei)에 입당했다. 하지만 쉰들러가 나치 독일에 관여한 것은 단순히 정당에 가입한 것 이상의 의미를 있다.

1936년부터 쉰들러는 나치 독일의 간첩이 되었다. 그는 독일군의 정보기관인 방첩청(아프베어; Abwehr)의 요원이었다. 1938년 7월 체코슬로바키아 경찰은 이러한 반역 행위로 그를 수감했다. 하지만 쉰들러는 자신의 죄에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체포된 직후, 나치 독일은 뮌헨 협정의 일환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 지방인 주데텐란트를 합병했다. 그 결과 쉰들러는 1938년 10월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곧바로 나치당에 입당 신청을 했다. 1939년 2월, 그는 임시 회원 자격을 얻었다.

쉰들러는 석방된 후에도 독일군 방첩청에서 계속 일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대한 나치 독일의 팽창 정책을 지원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체코 영토를 침공하여 점령했고, 이후 나치는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새워 이 지역을 통치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점령지 폴란드 내 유대인 소유 기업 인수

Entrance to Oskar Schindler's enamel works in Zablocie, a suburb of Krakow.

크라쿠프의 자보체(Zabłocie) 교외 지역에 설립된 오스카 쉰들러의 법랑 공장 입구. 폴란드, 1939~1944년.

Credits:
  • USHMM, courtesy of Leopold Page Photographic Collection
  •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쉰들러는 거처를 점령지 크라쿠프로 옮겼다. 당시에 그는 아직 방첩청에서 정보 요원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의 구체적인 임무는 분명하지 않았다.

크라쿠프에서 쉰들러는 전쟁의 수혜자가 되었다. 나치 독일 당국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폴란드인의 사유 재산을 빠르게 몰수하기 시작했다. 쉰들러는 이 광범위한 약탈 과정에 동참했다. 그는 결국 압수한 여러 사업체를 인수해 부를 쌓으려 했다.

특히 쉰들러는 법랑 제품을 만들던 유대인 제조업체(Rekord Ltd.)를 임대했다가 나중에 인수했다. 1939년 가을에 쉰들러가 Rekord, Ltd.를 인수한 것은 독일의 공식적인 승인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

Rekord, Ltd.는 원래 법랑 냄비와 프라이팬을 생산했다. 쉰들러는 사업체 이름을 독일법랑제품공장(Deutsche Emalwarenfabrik; DEF)로 변경했다. 공장은 종종 에말리아(Emalia); 폴란드어로 "법랑")라고도 불렸다. 쉰들러는 크라쿠프에서 두 개의 다른 사업체도 운영했는데, 그중 적어도 하나는 유대인 소유주로부터 뺏은 것이었다.

쉰들러는 특히 뛰어난 사업가는 아니었다. 그는 에말리아를 운영하기 위해 이전 소유주 중 일부, 특히 아브라함 뱅키에(Abraham Bankier)에 의존했다. 유대인이었던 뱅키에는 전쟁 전에 Rekord, Ltd.의 일부 소유주로서 공장을 관리했었다.

쉰들러 에말리아 공장의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 1940년1943년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 당국이 점령지 폴란드에서 만든 착취적인 노동 체제를 최대한 활용했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비유대인 폴란드인이 쉰들러의 공장 노동자였다. 그가 고용한 유대인은 뱅키에와 몇몇 다른 관리자뿐이었다. 1941년 또는 1942년부터 쉰들러는 크라쿠프 게토에서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을 에말리아 공장에 고용하기 시작했다.

쉰들러는 유대인 강제 노동자를 유대인이 아닌 폴란드 노동자보다 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고용했다. 독일 점령지 폴란드에서 공장주들은 일반적으로 유대인 강제 노동자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친위대에 일일 임대료를 냈다.

공장주들은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학대하고 혹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쉰들러는 에말리아에서 직원들을 잘 대우했다고 한다.

추방 조치에 개입한 쉰들러, 1942년 6월

독일인의 유대인 학대와 학살은 쉰들러와 그의 공장에 영향을 미쳤다. 1942년 여름, 독일 당국은 크라쿠프 게토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을 베우제츠(Belzec) 절멸수용소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6월에는 아브라함 뱅키에를 포함한 에말리아의 유대인 강제 노동자 14명이 추방 과정을 위해 체포되었다. 쉰들러는 이를 막기 위해 직접 개입하여 그들을 구했다. 공장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그들이 필요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쉰들러가 열차의 목적지나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 쉰들러의 개입 덕분에 그들의 목숨은 구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유대인 구조 단체와 쉰들러의 연대

쉰들러는 크라쿠프의 유대인 수감자들을 돕기 위한 개인의 노력 외에 더 광범위한 유대인 구조 조직과 관련하기 시작했다.

1942년 말부터 쉰들러는 구호 구조 위원회(Vaada L’Ezra Vehatsalah)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둔 유대인 구호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헝가리 유대인들이 주도했는데, 조엘 브랜드(Joel Brand)와 루돌프 카스트너(Rudolf Israel Kastzner)이 그 가운데 포함되었다. 쉰들러는 운반 역할을 했다. 그는 유대인 수감자들에게 돈, 편지, 정보를 전달하며 도왔다.

1943년 11월, 쉰들러는 부다페스트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독일 점령지 폴란드의 유대인 대량 학살에 관한 정보를 위원회에 제공했다.

크라쿠프 게토 말살 당시 유대인을 보호한 쉰들러, 1943년 3월

쉰들러는 1943년부터 유대인을 돕는 일에 더욱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해 3월, 독일군은 크라쿠프 게토를 청산(Liquidation)하고 남은 주민 다수를 학살했다. 게토가 청산되는 동안 쉰들러는 자신의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공장에서 하룻밤을 지내라고 지시하여 그들을 보호했다. 그 결과, 이 유대인 노동자들은 잔혹하고 무자비한 행동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후 에말리아에서 일했던 수감자들은 게토에서 인근 플라스초프(Plaszow)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나의 행동과 내면이 변화된 이유는 매일 유대인들이 겪는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점령지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행동을 목격하는 것이었다.
— 오스카 쉰들러

유대인 수감자들의 피난처 에말리아: 1943년–1944년

크라쿠프 게토가 청산된 후에도 쉰들러는 에말리아에서 유대인 강제 노동자를 계속 사용했다. 처음에, 이 강제 노동자들은 플라스초프 노동 수용소에서 살았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에말리아로 일하러 이동했다. 나중에 그들은 쉰들러의 공장에 세운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쉰들러와 플라스초프 사령관 아몬 괴트의 우정

플라스초프에서 수감자들은 나치 친위대 사령관 아몬 괴트(Amon Göth)의 지휘 아래 극심한 고난과 무차별적 폭력 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괴트는 1943년 2월부터 1944년 9월까지 플라스초프를 운영했다. 그는 과도하고 가학적인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종종 자신의 별장 발코니에서 수감자들을 향해 총을 쐈다. 제멋대로 처형도 저질렀다. 쉰들러는 괴트의 친구가 되어 괴트의 빌라에서 열린 잔치에도 참석했다. 쉰들러는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와 뇌물을 이용해 사령관으로부터 호의를 얻었다. 이를 통해 쉰들러는 공장을 더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고 유대인 포로들을 도울 수 있었다.

에말리아의 쉰들러 수용소, 1943-1944년

1943년 어느 날, 쉰들러는 괴트에게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이 플라스초프 외곽의 에말리아 수용소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보조 수용소는 에말리아 공장 단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수용소에 살았던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은 에말리아와 다른 세 개의 인근 공장에서 일했다.

에말리아 수용소의 환경은 플라스초프 메인 캠프보다 훨씬 좋았다. 쉰들러와 오스트리아 출신 공장주인 율리우스 마드리치(Julius Madritsch)는 암시장에서 수감자들을 위해 식량을 구했다.

1944년 1월, 나치 친위대는 플라스초프의 명칭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강제수용소로 변경했다. 에말리아 수용소는 공식적으로 자보체(Zabłocie) 보조 수용소라고 불렸다. 1944년 여름, 보조 수용소에는 약 1,450명의 유대인 수감자가 있었다.

1943년 또는 1944년에 쉰들러가 에말리아에 군수 공장을 건설했다. 유대인들이 건설한 이 공장은 1944년 늦여름에 완공되었다.

쉰들러의 에말리아 수용소의 종말, 1944년 여름

1944년 여름, 소련군은 폴란드로 진격하여 크라쿠프로 향했다. 독일 당국은 플라스초프와 에말리아를 포함한 그 보조 수용소를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당국은 점령지 폴란드의 군수 공장을 독일 내륙으로 이전하라 명령했다. 여기에는 에말리아에 있는 쉰들러의 군수 공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인 수백 명의 수감자들이 에말리아에서 플라스조프로 이송되면서 쉰들러의 보호를 잃었다. 많은 사람이 즉시 혼잡한 화물차에 실려 갔다. 그 후 그들은 마우트하우젠(Mauthausen)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몇몇 수감자들은 쉰들러가 마지막 순간에 작지만 의미 있는 방식으로 그들을 돕고자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괴트와 친위대 경비원에게 뇌물을 주어 플라스조프 역과 마우트하우젠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에게 물을 주도록 했다. 기차가 플라스조프를 떠난 후에 쉰들러는 더 이상 이 사람들을 도울 수 없었다.

쉰들러가 에말리아에서 한 노력은 여전히 중요했다. 쉰들러는 에말리아 수감자들이 공장에서 보호받고 비교적 잘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마우트하우젠의 극한 환경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점에 쉰들러와 함께 에말리아에는 약 300명의 유대인 남성 수감자만 남아있었다. 그들은 쉰들러가 군수 공장을 해체하고 다른 장소로 이전하는 일에 돕는 것이었다.

브룬리츠로 군수 공장 이전, 1944년 가을

Construction of Oskar Schindler's armaments factory in Bruennlitz.

브뤼엔리츠(Bruennlitz)에 건설 되고 있는 오스카 쉰들러의 군수품 공장. 체코슬로바키아, 1944년 10월.

Credits:
  •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courtesy of Leopold Page Photographic Collection

1944년 가을, 쉰들러는 군수 공장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브룬리츠(Brünnlitz; 현재 브르네네츠; Brněnec) 마을로 이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브룬리츠 공장 수용소는 그로스-로젠(Gross-Rosen) 강제 수용소의 보조 수용소였다. 독일 당국은 약 1,000명의 유대인 수감자를 플라스조프에서 브룬리츠로 이송하여 쉰들러의 공장에서 일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남성 700명, 여성 300명이 포함되었다. 플라스조프의 유대인 포로들에게 브룬리츠로 이송된다는 것은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은 더 열악한 상황에 직면했다.

오스카 쉰들러가 리스트를 만들었는가?

오스카 쉰들러는 리스트를 만들지 않았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개념은 홀로코스트 당시 쉰들러의 구출 활동을 짧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쉰들러가 구출한 수감자들의 명단으로 이해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플라스조프 강제 수용소에서 쉰들러의 브룬리츠 공장으로 이송된 수감자들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플라스조프에서 브룬리츠로 이동 명단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를 위한 별도의 목록이 있었다. 목록의 이름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또한, 이 전출 명단은 쉰들러가 작성한 것이 아니며, 쉰들러는 명단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없었다. 이 목록은 실제로 마르셀 골드버그(Marcel Goldberg)가 작성했다. 골드버그는 플라스조프 수용소에서 나치 친위대의 아래 근무한 유대인 수감자 관리자였다. 그는 브룬리츠에 있는 쉰들러의 공장으로 이송할 남녀 수감자 명단을 따로 작성했다.

골드버그가 작성한 명단에는 쉰들러와 마드리치의 공장에서 일했던 유대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목록에는 저명한 유대인 수감자 관리자와 그 가족들이 포함되었다. 일부 수감자들은 골드버그에게 뇌물을 주고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머지는 단지 운이 좋았다.

플라스조프에서 브룬리츠로 이송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말리아에서 오스카 쉰들러를 위해 일한 적이 없었다. 당시 쉰들러는 이들 대부분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브룬리츠로 수감자 이송, 1944년 가을

플라스조프에서 브룬리츠로 수감자를 이송하는 과정은 혼란스러웠다. 이송 도중 수감자들은 일시적으로 쉰들러의 관리에서 벗어나 쉰들러는 그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

남성 포로들은 그로스-로젠을 거쳐 브룬리츠로 이송되었다. 며칠 만에 브룬리츠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거쳐 이송되었다. 그들은 3주 동안 그곳에 억류되어 있었다. 여성 수감자들에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보낸 시간은 끔찍하고 위험하며 수치스러운 시간이었다. 나이 많은 여성 수감자 한 명이 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여성들은 결국 1944년 11월 중순 브룬리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쉰들러는 전달자를 통해 이들의 석방을 보장하기 위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중적인 오해와는 달리, 그는 직접 방문하지 않았다.

그로스-로젠과 아우슈비츠에서는 브룬리츠 수용소 수감자 명단에서 일부 수감자가 삭제되고 다른 수감자와 교체되었다.

브룬리츠에서 쉰들러의 구조 노력

쉰들러의 가장 중요한 구출 활동은 브룬리츠 수용소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절망적인 몇 달 동안 이루어졌다. 쉰들러는 1944년 10월 수용소 설립부터 1945년 5월 해방될 때까지 유대인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헌신했다. 크라쿠프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모두 써야 하는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나치 친위대(SS)로부터 수감자 보호

브룬리츠는 그로스-로젠의 보조 수용소였기 때문에 나치 친위대 지휘관이 운영하고 나치 대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쉰들러는 친위대 사령관이 수용소를 청산하고 유대인 수감자들을 학살할까 봐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오스카와 에밀리 쉰들러는 나치 친위대로부터 유대인 포로들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에 세운 아파트에서 살았다.

브룬리츠에서 음식과 의약품 확보

브룬리츠에서 에밀리 쉰들러는 오스카가 부족한 식량과 의약품을 구하도록 도왔다. 쉰들러는 그 비용을 자비로 지급했다. 부인 에밀리는 오스카의 구조 활동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지역 주민들도 수감자들에게 몰래 식량을 공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한 생산량 조작

브룬리츠 공장은 군수 공장으로 분류되었다. 이는 공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쉰들러는 수감자들이 모두 독일 전쟁 노력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하는 숙련된 노동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공장에서 생산한 탄약은 마차 한 대에 불과했다.

쉰들러는 유대인 수감자 이츠크 슈테른(Itzhak Stern)과 미에텍 펨퍼(Mietek Pemper)의 도움으로 나치 독일 당국을 속이기 위해 생산량을 조작했다. 이 속임수는 나치 친위대가 수용소를 폐쇄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했다.

다른 수감자 돕기

다른 포로들이 이 지역에 도착하자 쉰들러 부부는 그들을 브룬리츠에서 돌보기로 했다. 총 세 차례에 걸쳐 다른 수용소로부터 수송 열차가 도착했다. 쉰들러 부부는 그들을 브룬리츠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들은 치료와 음식을 제공했다.

1945년 4월 18일 브룬리츠의 수감자 명단에는 1,098명(남성 801명, 여성 29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플라스조프에서 이송된 유대인들과 새로 도착한 유대인의 이름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목록이 "쉰들러 리스트"로 여겨지기도 한다.

해방

브룬리츠 수용소는 1945년 5월에 해방되었다. 쉰들러 부부는 소련군이 수용소에 도착하기 직전인 1945년 5월 9일에 브룬리츠를 떠났다. 그들은 소련군의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서쪽으로 도망쳤다. 오스카가 떠나기 전에, 유대인 수감자들은 그에게 금반지와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는 내용의 서명된 진술서를 건넸다. 쉰들러 부부는 결국 독일에서 연합군이 점령한 구역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쉰들러의 삶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쉰들러와 그의 아내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 전 독일 간첩으로 활동한 그는 그곳에서 전범이 되었다. 독일계라는 배경 때문에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를 환영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계 주민들을 추방했다.

쉰들러 가족은 몇 년 동안 독일의 미국 점령지인 레겐스부르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쉰들러는 전직 유대인 수감자들과 유대인 구호 단체에게 반복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유대인 구출을 위해 사용한 돈에 대해 미국 유대인 합동 분배 위원회(이하 '합동 위원회')에 재정적 보상을 요구했다. 쉰들러는 자신이 264만 마르크(당시 미국 돈으로 약 100만 달러)를 썼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서독 정부에 공장 손실에 대한 보상도 신청했다.

1949년, 오스카와 에밀리는 아르헨티나에 이민했다. 그곳에서 오스카는 사업을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빚더미에 앉았다. 1957년, 쉰들러는 홀로 독일로 돌아갔다. 그는 에밀리와 영구적으로 별거를 했지만 이혼하지는 않았다. 쉰들러는 1974년 10월 독일에서 사망했다. 그는 이스라엘에 묻혔다.

쉰들러가 도움을 준 많은 유대인은 전쟁 후에도 그에게 헌신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들은 종종 쉰들러 유대인(Schindlerjuden)이라고 불린다.

쉰들러란 이름이 저명해지다

오스카 쉰들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전쟁 후 쉰들러 유대인들의 노력 덕분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 일부 쉰들러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이야기를 알리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쉰들러의 이야기는 신문, 책, 영화에 등장했다. 1957년, 쉰들러에 대한 글은 홀로코스트의 구조자들을 다룬 독일 서적에 실렸다.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오스카 쉰들러를 유명한 이름으로 만들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이 영화는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199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하여 7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주로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1982년 소설 쉰들러 리스트(원제 쉰들러의 방주)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케널리는 쉰들러가 구한 유대인 중 한 명인 레오폴드 페이지(Leopold Page)와 긴밀히 협력했다.

소설과 영화는 미국 대중에게 쉰들러의 이야기를 알렸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일부 부정확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구조자로서의 쉰들러

오스카 쉰들러의 파렴치함과 기회주의적 성향 덕분에 그는 유대인 수감자들의 효과적인 보호자가 되었다. 하지만 쉰들러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부도덕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구조자로서의 명칭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에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 기관인 야드 바셈(Yad Vashem)이 그를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선정했을 때 논란이 있었다. 많은 쉰들러 유대인이 그의 지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크라쿠프 출신의 유대인 남성 두 명이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쉰들러를 절도 및 학대 혐의로 고발했다.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쉰들러는 야드 바셈의 초청을 받아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한 나무를 심었다. 그의 식수식은 1962년 5월 8일에 진행되었다.

1963년 말, "열방의 의인" 칭호를 수여한 위원회는 쉰들러에게 정식으로 그 명예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993년, 야드 바셈은 이전의 결정을 뒤집고 오스카 쉰들러와 에밀리 쉰들러에게 칭호를 다시 수여했다.

오스카 쉰들러는 홀로코스트 당시 영웅적인 구조자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구조 작업의 복잡성과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In Yad Vashem, the Israeli national institution of Holocaust commemoration, Oskar Schindler plants a tree in honor of his rescue ...

오스카 쉰들러가 야드 바셈의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 거리에 나무를 심고 있다.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은 홀로코스트 당시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도운 공로로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에서 영예를 수여받은 비유대인 사람이다.

Credits:
  •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courtesy of Leopold Page Photographic Collection

Footnotes

  1. Footnote reference1.

    1943년 에말리아 수용소는 유대인 수용소(Judenlager) 또는 보조 수용소(Nebenlager)로 불리기도 했다. 플라스조프에 소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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