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kar Schindler standing (second from right) with some of the people he rescued.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 독일의 최대 규모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는 유대인 1,000여 명을 구출했다.

중요 사실

  • 1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 사업가이자 나치당원이었다. 1939년 11월, 그는 유대인 및 폴란드인 소유 기업을 소위 "아리안화" 또는 "독일화"하는 정책을 통해 점령지 폴란드의 몇몇 공장을 인수하게 되었다.

  • 2

    이들 중 오늘날 최고 유명한 공장이 크라쿠프(Kraków)의 "에말리아"(Emalia) 공장이다. 원래 쉰들러가 인수하기 전에 유대인의 소유였다. 에말리아에서 쉰들러는 크라쿠프-플라스초프(Krakau-Plaszow) 수용소의 유대인 강제 노동자를 고용했다.

  • 3

    쉰들러는 유대인을 고용하여 강제 수용소의 잔혹한 생활로부터 보호했다. 그의 노력으로 유대인 1,000여 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쉰들러는 사후 1993년에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오스카 쉰들러(1908~1974)는 1908년 4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츠비타우(Zwittau; 현재 체코의 스비타비, Svitavy)에서 태어났다. 쉰들러는 독일계 사람이자 가톨릭 신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 쉰들러는 새로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다.

몇몇 직업학교에 다니고 1928년에 에밀리 펠츨(Emilie Pelzl)과 결혼한 쉰들러는 아버지의 농기계 사업을 운영하고, 운전 학교도 열고, 정부 재산을 매각하는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1938년에는 예비군에서 상병이 되었다. 쉬들러는 1936년 독일군의 정보기관인 방첩청(아프베어; Abwehr)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병합한 지 5개월 후 1939년 2월 그는 나치당에 입당했다. 이때까지 삶에 좋은 것만 찾는 기회주의적 사업가였던 쉰들러가 전시에 구원자로 변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쉰들러는 1,000여 명 이상의 유대인이 나치 독일의 최대 규모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이송당하는 것에 보호했다.

쉰들러의 크라쿠프 "에말리아(Emalia)" 공장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후, 쉰들러는 1939년 10월에 거처를 크라쿠프로 옮겼다. 소위 총독부(Generalgouvernement)에서 유대인 및 폴란드인 소유 기업을 "아리안화"하고 "독일화"하기 위한 독일 점령 정책을 통해 1939년 11월에 법랑 제품을 만들던 유대인 제조업체(Rekord Ltd.)를 인수했다. 그는 공장을 개조하면서 에말리아(Emalia), 또는 오스카 쉰들러 독일법랑제품공장(Deutsche Emalwarenfabrik Oskar Schindler)를 설립했다.

쉰들러는 크라쿠프에서 다른 두 개 공장도 운영했지만, 크라쿠프 게토에 거주하던 유대인 인력을 고용한 곳은 에말리아뿐이었다. 1944년 에말리아가 가장 번창했을 당시 1,700명의 일꾼이 있었는데 최소 1,000명은 유대인 강제 노동자였다. 독일군은 1943년 3월에 크라쿠프 게토를 청산(Liquidation)하자 강제 노동 수용소와 크라쿠프-플라조우 강제 수용소로 배치되었다.

1943년 3월부터 에말리아가 다음 해에 보조 수용소가 될 되까지 유대인들은 플라조우 수용소에 수감되어 잔혹한 대우를 당했다. 이 시기에 쉰들러는 그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개별적으로 위협에 있는 유대인을 뇌물과 사교술로 구하고 1944년 후반까지 친위대가 유대인 근로자를 이송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유대인 인력이 전쟁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에말리아에 군수 제조 부서를 추가하였다. 1943년 3월 크라쿠프 게토가 청산당하는 동안 쉰들러는 자신의 유대인 근로자들이 공장 부지에서 밤새 머물 수 있게 허락했다.

Deportation from the Krakow ghetto at the time of the ghetto's liquidation.

게토를 폐쇄할 시점에 크라쿠프 게토에서의 이송. 폴란드, 크라쿠프, 1943년 3월

Credits:
  • Instytut Pamieci Narodowej

"에말리아": 플라조우 강제 수용소의 보조 수용소

친위대가 1944년 1월 플라조우를 공식적으로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강제 수용소로 변경하자 쉰들러는 친위대를 설득하여 에말리아를 플라조우의 보조 수용소로 전환했다. 자신의 근로자로 등록된 약 1,000명의 유대인 강제 노동자 이외에도 쉰들러는 근처 공장에서 일하던 450명의 유대인도 에말리아에 살도록 승인받았다. 이를 통해 플라조우에서 일상적으로 진행되던 조직적인 잔혹함과 자의적인 살인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냈다.

쉰들러의 개인적 위험이나 비용 없이 행동하지 않았다. 쉰들러가 자신의 유대인 근로자들을 보호하는 모습과 수상한 사업 거래를 지켜본 친위대 및 독일 당국에 그가 부패하여 유대인을 허락 없이 지원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독일 친위대와 경찰관들이 그를 세 차례나 체포하였으나, 에말리아를 소유하고 있는 동안 기소할 수는 없었다.

쉰들러 리스트

1944년 10월 친위대가 에말리아 유대인을 플라조우로 이송한 후,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을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그의 고향 근처였다)의 브룬리츠(Brünnlitz; 현재 브르네네츠; Brněnec)로 이전하고 군수 공장으로만 재개할 방법을 모색한 후 허가를 받았다. 그의 조수 중 하나가 새 공장에서 일할 1,200명의 유대인 수감자 목록을 작성했다. 이 목록들은 통틀어 "쉰들러 리스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쉰들러는 친위대가 브룬리츠를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의 보조 수용소로 분류되도록 요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고, 이에 따라 친위대가 플라조우부터 그로스-로젠을 통해 브룬리츠로 이송한 약 800명의 유대인 남성과 플라조우부터 아우슈비츠 통해 이송한 300~400명의 유대인 여성을 구할 수 있었다.

군수 공장으로 분류되기는 했으나, 브룬리츠 공장은 8개월에 미치지 못하는 운영 기간에 마차 한 대 분량의 탄약만 생산했다. 쉰들러는 가짜 생산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군수 공장으로서 보조 수용소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이것을 통해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의 생존이 가능했으며 평시 수용소 생활의 공포와 잔혹함으로부터 겪지 않게 되었다. 1945년 5월 9일, 쉰들러는 소련군이 수용소를 해방한 날에 브룬리츠를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2차 세계대전 후 쉰들러와 아내 에밀리는 1949년까지 독일 레겐스부르크에 정착했다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1957년 에밀리와 완전히 별거했지만 이혼하지는 않은 쉰들러는 홀로 독일로 돌아갔다. 1974년 10월 쉰들러는 빈털터리로 독일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그가 살려 준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쉰들러의 시신을 이스라엘에 안장하기 위해 로비하고 자금을 마련했다.

1993년에 야드바솀(Yad Vashem)은 홀로코스트에 상당한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구한 노력을 인정하여 오스카 쉰들러와 에밀리 쉰들러에게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쉰들러의 이야기는 그의 삶과 업적을 다룬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1983년 쉰들러의 방주소설을 바탕 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1993년 아카데미 작품상 영화 쉰들러 리스트 덕분에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 영화는 대중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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